▲깔뱅을 잘 위로하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던 마틴 부쳐 목사.
마틴 부쳐는 결혼으로 파문을 당하지만, 성 토마스 교회에서 사제가 아닌 목사로서 목회하면서 개혁 사상의 열렬한 수호자(守護者)가 되어, 깔뱅에게도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쳐 성숙한 개혁자가 되는 데 이바지한다. 부쳐와 함께 1506년-1541년까지 주교였던 기욤까지도 자신에게 속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시도하므로, 1524년에는 자신들의 언어인 독일어 미사가 시작되었다. 나아가 개혁자들은 교회 안에서 비성경적인 가톨릭 요소들을 제거하였고, 가톨릭 예식 철폐 및 성상(聖像)들을 철거하며 사제들을 추방하였다.

개혁자들 가운데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던 쟈크 스트럼(Jacques Sturm 1489-1553)과 쟝 스트럼(Jean Sturm 1507-1589)이 있었다. 쟈크는 알사스 사람으로 1524년부터 의원이 되어 국민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많은 학교들을 세우며, 개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죽었을 때 “Pere de la patrie (조국의 아버지)”라 불렸으며, 깔뱅으로 하여금 교회의 정치적 개념을 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530년경에 프랑스 위그노 도피자들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만들기도 한다. 1535년에는 도미니카 수도원에 책을 기부하고 진열해서 국민 도서관을 만들었고, 그곳에는 이미 1524년부터 7명의 교수로부터 시작된 신학 수업이 있었다. 까삐또는 구약, 부쳐는 신약, 에디옹은 역사와 신학을, 유대인 Antonin은 히브리어, 헬라어와 수학, 프랑수와 랑베흐(François Lambert)는 호세아서와 주석에 관한 강의 신학 교육도 행한다.

또한 쟝 스트럼은 프랑스 출신으로 꼴레쥬 프랑스(Collège de France) 교수로 깔뱅을 가르쳤고, 깔뱅이 1537년 처음 스트라스부르로 올 때도 그가 초청하였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짐나스(Gymnase)를 창시하여 학교 교육을 실시하였고, 깔뱅도 이곳에서 강의하였다. 오늘날까지 쟝 스트럼의 짐나스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깔뱅이 가르쳤던 강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1538년에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리는” 학생들을 엄벌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두 스트럼의 노력에 의해 1531년 가톨릭 교회였던 성 토마스 교회가 개신교회로 바뀌게 되고, 그 해 마틴 부쳐가 목사로 부임한다. 부쳐는 교회의 연합 운동에 주력하며, 개신교 신앙에 입각한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18세기 대학 가운데 유명한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기원이 된다.

▲성 토마스 교회의 마틴 부쳐 목사가 세운 학교가 현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모체가 된다.

▲마틴 부쳐 목사가 목회하였던 성 토마스 교회당은 1531년에 가톨릭 교회에서 개신교 교회로 바뀌게 됨.

▲ 교회당 안에 마틴 부쳐의 삶을 소개하는 명판이 있다.

▲모짜르트와 슈바이쳐 목사가 연주했던 오르간.

▲성 토마스 교회당에 있는 오르간.

개혁자들의 이런 노력으로 1530년부터 스트라스부르는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고, 1539년과 1541년 사이에 재세례파들이나 깔뱅과 같은 종교적 망명자들이 이곳으로 많이 피신하게 된다.

마틴 부쳐는 개혁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젊은 깔뱅이 체류할 수 있도록 잘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쳐 깔뱅으로 하여금 완숙한 개혁자가 되게 하였다. 또한 교육가 쟈크(Jacaues Strum)와 쟝(Jean Strum)과의 만남을 주선하므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깔뱅은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훗날 쥬네브(제네바) 아카데미 설립에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마틴 부쳐는 자신의 집에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가르치지만 루터와 차이점이 있었다. 사람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을 중단시켰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가까운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의 영을 주셨기에, 섬김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다양한 개혁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다양하고 다른 개신교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을 한다. 비텐베르그의 개혁자 루터와 쯔리히의 개혁자 쯔빙글리 사이에 성찬에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온유한 화해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부쳐는 황제와 주교의 연합 압력에 항거한 시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549년 4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초빙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도착한 지 채 2년이 못 되어 1551년 사망하게 된다. 그는 1549년에 성공회 예배 예식서인 「Book of Common Prayer」의 증보판 발간에 참여함으로써 성공회 예배의식 개혁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리스도의 통치론」을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함으로 영국교회의 개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부쳐는 1551년 2월 28일 캠브리지에서 죽어 대학 교회에 안장됐으며, 장례식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3,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그 후 피의 여왕이며 가톨릭 시대로 되돌린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 그의 유해가 파헤쳐져 캠브리지 시장(市場) 광장에 나무기둥에 묶인 채 불태워졌다. 그러나 메리 튜더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3년 후 엘리자베스 1세 즉위 후 엄숙히 사면되었고 그의 무덤은 가묘로 복구되었다.

부쳐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Conrad Hubert는 이렇게 마지막을 글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많은 종들 가운데 그는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과 끊임없는 활동은, 그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부쳐의 신학적 중요성은 20세기에 와서 재조명되었다.

마틴 부쳐의 이름은 깔뱅처럼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당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개혁자였으며, 그의 성경 주석은 후대의 주석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 신학 형성에 있어서 밑거름이 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