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예수는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와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다. 가야바는 예수가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고발한다. 그리고 로마인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유대인들보다는 동정적이어서 예수를 석방하려 하고 심지어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여태까지 예수를 따르던 백성들은 일단 예수가 체포되자 예수에 대한 열광(熱狂)에서 돌아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아우성을 지른다. 이것이 바로 군중심리요, 불안정한 대중들의 마음이다. 심지어 군중들은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한다면 가이사(황제)의 충실한 신하가 아니라고 협박한다. 여기서 두 가지 역설이 드러난다. 하나는 제도종교가 종교의 실체를 고발하는 역설이요, 위임받는 세속권력이 우주의 통치자를 심문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역설이다. 참 하나님은 이러한 두 가지 역설이 그의 아들의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겸허한 분이시다.


대제사장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고발된 예수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의 수하들에 의해 끌려가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가서 심문을 받는다.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증거를 찾는다. 많은 거짓 증인들이 왔으나 참 증거를 얻지 못한다.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증언한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예수는 자기를 고발하는 여러 질문에 대하여 변명하려고 하지 않고 침묵하신다. 가야바는 예수께 묻는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가야바는 이 말을 듣고 옷을 찟고 말한다: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마 26:65). 비통과 고통의 표시로서 옷을 찢는 관습은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일종의 의식(儀式)이 되어 있었다. 당시 재판관들이 재판 진행 중에 신성모독의 말을 청취해야 했거나 어떤 사람을 신성모독 죄로 판정을 내렸을 때에 자기들의 옷을 찢었다.

가야바는 공의회 회원들에게 그들의 의견을 묻는다. 모두들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마 26:66)고 말한다. 이에 이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마 26:67) 말한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8).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놀린다. 메시아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메시아(Messiah)는 히브리 말이요, 그리스도(Christos)란 희랍 말이다.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라는 뜻을 지닌다. 진정한 메시아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마치 저런 자가 메시아인가라고 여겨질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진정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시는 모습이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마 27:1) 다음 날 새벽에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준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네 말이 옳도다”(마 27:1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고발하되 예수는 이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대답을 하시지 않는다. 빌라도는 이를 기이히 여긴다(마 27:14).

유대인의 명절에는 총독이 군중들의 소원을 따라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습에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한다. 복음서 저자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고 생각했다. 마태는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마 27:19).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을 주저한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이방인인 유대 총독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예수를 놓아주기를 애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 23:13-16). 그러나 백성들의 성화는 거세진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고 생각하지만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군중들의 의견에 따르며, 자기의 의도에 반하여 내리는 사형언도에 대하여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대야에서 자기의 손을 씻는다. 빌라도의 이러한 행위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로마 제국에 대해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적으로 확정한 것이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로마체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빌라도가 선언해주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묻는 빌라도

복음서 저자 요한은 빌라도 심문을 받는 역사적 예수의 근원적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빌라도는 다시 관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빌라도가 말한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여기서 예수가 자신이 왕이라 하심은 이 세상에 국한된 정치적 왕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자신이 우주의 왕이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포괄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너무 좁게 해석하여 예수는 단지 구원받은 영혼들이 모인 왕국의 영적 왕이라고 하는 해석은 나사렛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를 너무 영적으로 협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받은 영혼들의 나라만이 아니라 빌라도가 그 왕국의 총독 노릇을 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포함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이 세상 나라와 그 뿐 아니라 앞으로 천상에서 내려와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다. 나사렛 예수는 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여기서 빌라도는 심문자이지만 오히려 피의자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묻고 있다. 빌라도는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의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가 진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성육신하신 진리 자체와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했다. 빌라도는 그 앞에 진리 자체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irony)이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예수를 못박으라”고 아우성치는 군중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비록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를 고발했다 하더라도 총독 빌라도는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이 일에서 손을 떼기를 원했고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변수가 있었는데 여태까지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군중들의 변심(變心)이다. 당시 유월절 절기에는 총독이 유대인들에게는 죄수 한 명을 방면해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 관례에 따라 열심당원 바라바와 예수 중에 한 사람이 석방될 수 있었다. 총독 빌라도는 이 둘 중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위를 한 바라바를 사형에 처하고 예수는 풀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중들이 강하게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 친 것이다.

누가는 이 부분을 잘 기록하고 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18-23).

복음서 저자 요한은 군중들이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 반역하는 것이라는 위협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주장하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대중영합주의의 희생물이 된 예수

총독 빌라도가 그처럼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으나 예수를 구출했어야 할 군중들은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하고 협박까지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는 희생양이 된다. 총독 빌라도는 군중들의 지지에만 관심을 가지지 진리와 정의의 실천에는 관심이 없다. 빌라도는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원죄에 근거하고 있는 대중영합주의(populism)이다. 여기에 오늘날에도 만연되고 있는 대중영합주의의 실상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가 알게 된다. 군중들에게는 자기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간다. 열광하다가 순식간에 변하여 냉대한다.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그 길이 바른 길은 아니다.

예수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좁은 길로 가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로서 사이비나 위선자들이 가는 길이요, 세상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필경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이에 반하여 진리의 길은 다수의 길이 아니라 소수의 길이며,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며, 영광의 길이 아니라 수욕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진리의 길이 외형적으로 화사(華奢)한 길이 아니라 어렵고 가시밭의 길이지만 피하지 않고 그리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바로 이 진리의 길,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두 가지 역설: 수구화 세력과 세속 권력이 진리를 처형

우리는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의 역사적 사실에서 진리에 저항하는 종교와 정치의 두 가지 역설을 보게 된다. 하나는 제도종교가 종교의 실체인 하나님의 아들을 고발하고 억압하고 없애려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권력이 권력의 실체인 우주의 통치자에 대하여 심문하고 정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림자가 실체를, 모조품이 진품을, 비진리가 진리를 심문하고 판결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이 역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율법 종교가 율법 완성자를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예수는 태초의 말씀이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며,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그런데 유대사회의 제도종교는 이 예수를 증오하고 고발하고 죽이려 하고 있다. 이것은 역설이다. 제도종교는 본래는 이 생명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긴 것이나 제도 안에 정착함에 따라서 그 자신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그리하여 생명 자체보다는 자기 자신의 존속을 위하여 존재하고자 한다. 제도종교의 두 유형은 바리새인의 종교와 사두개인의 종교이다. 바리새인의 종교는 율법 종교의 유형이며, 사두개인의 종교는 인본화된 종교의 유형이다. 둘 다 자기의 존속과 보존을 위하여만 노력하는 수구화 종교이다.

둘째, 영원한 통치자로부터 그 권력을 위임받은 세속의 권력이 영원한 통치자를 심문하고 판결하고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세속의 권력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자기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권력 자체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자들을 처단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종교적으로 진지하지는 못했다. “내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는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빌라도는 진리의 의미에 대하여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예수를 단지 세속권력에 저항하는 자로 보고 더 이상 진리에 대한 대화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요구에 영합하여 만 것이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복음을 제도종교화하는 위험성과 세속적으로 권력화하는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기독교, 로마천주교, 제도화된 개신교 교권주의는 자기 권익을 수구화하는 걸림돌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진리를 세속화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이것들은 자기들의 집단을 보존하고자하는 수구화에 몰두하고 있다. 세속권력 역시 내재화된 세계관의 자기충족의 체계 속에서 진정한 초월적 진리의 질문을 차단시킨다. 세속권력 역시 오늘날 과학기술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그것을 신격화하고 진리 자체를 세속화 시키고자 한다. 복음적 진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이 두 가지 걸림돌을 제거하면서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분의 인격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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