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4월 깔뱅, 네락(Nérac)으로

▲엉굴렘에서 250Km, 파리에서는 무려 710Km 떨어진 네락. 이곳을 방문하지 못한 상태에서 글을 기고함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함.
네락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스코뉴 지방의 아테네’라 불릴 정도로 고대 갈로 로마 시대의 마을이며 동시에 위그노 왕국의 수도였다.

위그노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수와 1세의 누이인 마흐규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492년-1549년)가 네락에 머물면서 부터이다. 그녀는 엉굴렘에서 태어났고 나바르 왕국의 왕이 되는 앙리 2세와 재혼한 후에 네락으로 오게 된다. 그녀는 훗날 ‘엉굴렘의 마흐규리트(Marguerite d' Angoulem)’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여왕이 된 그녀는, 네락을 학술적인 도시로 만들고자 노력하였고, 인문주의 학자 르페브르(Lefèvre d'Etaples), 시편 찬송으로 위그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끌레망 마호(Célment Marot), 그리고 깔뱅을 초대할 정도로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부르쥬를 대학 도시가 되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그녀 역시 중세 문학의 대표작이 되는 「엡타메롱(7일 이야기): Heptaméron」(1559)이라는 단편집을 집필한다.

▲여왕 마흐규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1492년-1549년).
그녀의 도움으로 네락으로 도피했던 끌레망 마호는 “네락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은신처”였으며, “여왕은 여인의 몸과 남자의 심장과 천사의 머리를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모(Meaux) 출생으로 파리에서 깔뱅을 비롯한 개혁자들과 만나 설교했던 궁중 설교가 출신 제하드 루셀(Gerard Roussel)도 그녀의 보호 아래 그리 멀지 않은 끌레락(Clairac) 수도원에 머물며 학교를 세우며 강의를 하고 있었다.

네락을 방문한 깔뱅은 프랑스 종교 개혁의 기틀을 만들었던, 1530년부터 1536년 죽는 날까지 왕비가 제공한 왕궁에 머물고 있던 80세의 르페브르를 만나게 된다. 젊은 깔뱅의 방문을 받은 그는 “그대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을 받았다. 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전했고, 프랑스 종교 개혁은 이제 깔뱅의 몫으로 넘겨지게 된다.

▲네락 성. 현재는 앙리 4세 박물관이다.

마흐규리트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깔뱅은 르페브르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을 내다볼 수 있는 탁월한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네락은 위그노들에게 있어 중요한 정신적 안식처였고, 도피 중이던 깔뱅 역시 개혁자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이곳 네락에서 받게 된다.

▲ 네락에 있는 앙리 4세 동상.
깔뱅은 또한 끌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마흐규리트 여왕은 벽보 사건 이후인 1535년부터 프랑스 왕궁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제라르 루셀의 도움으로 개신교적 영적 정신을 받게 된다.

마흐규리트의 딸 쟌느(Jeanne d'Albret) 시대에 이곳은 개신교의 수도가 역할을 하고, 마흐규리트 여왕의 손자 앙리(Henri de Navarre; 훗날 앙리 4세) 시대에는 네락이 진정한 정치적 수도가 된다.

1572년에 쟌느가 죽고, 그녀의 아들 앙리는 마고 여왕이라고 알려진 Marguerite de Valois II와 결혼하여 1578년 네락으로 처음으로 내려온다. 네락은 영적, 문화적인 고향 집과 같은 정신적인 수도가 되며, 앙리4세가 프랑스 왕국의 통일 왕이 되어 부르봉 왕가를 탄생시킨다.


1534년 쁘아띠에(Poitiers) 일대를 방문하는 깔뱅

▲엉굴렘에서 쁘아띠에는 120Km 떨어진 곳이다.
깔뱅의 신학 중 ‘불가항적 은혜’가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부르심…….

그의 이런 신학은 아마도 그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파리로, 어린 나이의 외로움 속에서도 선한 이웃들을 만나 위로와 개혁자로서 눈을 뜨게 하였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 라틴어와 헬라어를 습득하여, 훗날 ‘행동하는 개혁자’ 이전에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준비를 갖추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의 출교 사건으로 할 수 없이 오흘레앙으로 가야 했던 가난한 그의 삶……. 그러나 그곳에서 깔뱅은 독일인 볼마 교수를 통하여 루터의 사상들을 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었고, 그를 따라 부르쥬까지 간다. 그곳에서 그는 개혁자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고, 훗날 동역자인 베즈를 만난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개혁을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그 후 신학과 법학 공부를 마치고 파리에서 히브리어를 좀 더 습득하던 중 벽보 사건으로 도망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젠 공부도 다 끝났고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했고, 그 먼 엉굴렘으로 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준비할 수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도 더 있을 수 없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다가 네락으로 가서 르페브르와 마르그레트 여왕 등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고 개혁가로서의 위로와 충고를 받는다. 그리고 쁘아띠에로 가서 두 달을 숨어 지낸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접촉하다가 어떤 날에는 그가 자주 갔던 동굴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깔뱅이 피신한 뒤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던 동굴로 현재는 깔뱅 동굴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그 이전까지는 깔뱅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온 삶이라면, 이제부터는 그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개혁자로서 아직 초보자요, 무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다. 그 결과 깔뱅이 두 달 동안의 머물렀던 쁘아띠에는, 깔뱅의 사역으로 인해 훗날 프랑스 기독교의 4대 도시 중 하나가 된다.

그의 설교는 무엇이 달랐을까? 왜 그를 만나면 사람들은 변화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달되었길래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고, 많은 이들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그를 ‘도망자’, ‘비겁자’라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걱정했던 것일까?

오늘날 담임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숨을 걸고 순교할 교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깔뱅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가르침과 과연 어떻게 달랐던가? 그가 전한 복음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것을 들은 이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뀔 수 있었던 것일까?

평신도 뿐 아니라 목회자들 역시 순교의 길에 앞장을 섰다. “복음을 전하는 나 자신은 과연 내가 전하는 그 가르침을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는 아니더라도, 복음을 위해 내 자신의 명예와 위치를 포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깔뱅의 삶은 도망자의 삶이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음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통하여 깔뱅도 위로와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복음을 듣는 자들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깔뱅의 인생은 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절대 불가항력적 은혜”라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의지로 개혁자의 길에 들어 선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요구를 따라 도시를 이동하였고, 핍박 때문에 도망쳐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거대한 개혁의 물줄기 한 가운데로 그를 내보내셨고, 그를 통하여 가는 곳곳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는 ‘신자의 신앙’을 강조했지만, 깔뱅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먼저 언급하게 됐었는지도 모르겠다.

쁘아띠에에서 느낀 깔뱅에 대한 소감을 다 쓰고 나서, 우연히 깔뱅의 글 한 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본인이 느낀 것과 흡사한 내용의 고백을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신비한 섭리로 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내가 나를 고삐로 길들여서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하는 그를 발견했을 때, 마치 빛이 나를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저항할 수 없었다.”

쁘아띠에에서 깔뱅은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개혁자로서의 삶을 결단하게 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 사제직을 반납한다. 쁘아띠에에서 또 다른 깔뱅의 중요한 결단은 성찬에 대한 제정이었고, 쁘아띠에 교회 역사에 의하면 그의 생애 첫 성찬식을 이곳에서 집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할 수 없이 떠밀려온 삶이었지만, 때마다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역시 원치 않는 환경과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우리의 주인 되신 그 분이 우리를 밀어 넣으신 것이라면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작다고 무관심하지 말고, 적다고 기죽지 말고, 내가 만난 그 사람이 훗날 한 도시를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에 크고 작음으로 판단하지 말고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 같다.

▲유럽으로 북상하던 무슬림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한 기념탑.

쁘아띠에는 과거 이슬람 문화가 유럽쪽으로 진격하여 오다가 멈춘 곳이다. 그리고 가톨릭 세력들이 위그노를 진멸하기 위하여 내려오다가 멈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거대한 종교적 세력들을 멈추게 했던 큰 힘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곳에 복음이 아주 급하게, 그리고 아주 깊게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일 것이다.

▲ 첫 모임을 가졌던 학교의 모습.

쁘아띠에에 도착한 깔뱅은 Collège Sainte Marthe(현재 Collège Henri IV) 지하실에서 첫 모임을 시작했다. 깔뱅은 이곳에서 그의 개혁 사상을 이어갈 4명의 제자를 만들게 된다. 그 중 한 사람은 검사이며, 다른 한 사람은 로마 법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이들은 대학 캠퍼스 내에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 한 사람인 기욤 소니에(Guillaume Saunier)는 1546년에 이단죄로 화형당한다. 비밀히 모인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 시편을 찬송하다가, 1554년까지 유아세례를 줄 목회자가 없었기에 1555년 쥬네브에서 첫 목사들을 파송하게 되며, 쁘아띠에 지역에 교회를 조직한다.

▲쁘아띠에 교회 외부 사진(건물은 깔뱅의 후예들이 훗날 세운 교회당임).

▲쁘아띠에 교회 내부 사진(파송 교회 담임 목사님 방문시).

▲쁘아띠에 개혁 교회의 과거 목회자 명판.

교회 설립 2년 뒤, 1557년에 법 전공한 교인들에 의해 장로를 비롯한 교회 사역자들의 각 역할에 관한 규정을 작성한다. 1558년 말경에 파리의 목사의 지도하에 목회자 협의회가 조직되며, 1559년 파리에서 비밀히 열리게 될 첫번째 교회 회의를 성탄절에 쟝 보세(Jean Baucé)의 집(rue le Basle)에 모여 결의하게 된다. 이 회의에서 깔뱅주의 개혁교회들을 위한 ‘라호쉘 신앙고백’이라 일컫는 신앙고백을 만들게 된다. 1561년에는 쁘아띠에에서 두번째 총회가 열릴 정도로 주변 지역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1562년 3월에 시작되는 40년 종교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쁘아띠에 교회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 깔뱅의 사역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좌측의 사진에서 보는 쁘아띠에 교회의 자체 역사 기록판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역사 기록이 있다.

“1534년에 깔뱅이 두 달을 쁘아띠에 머무르면서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 분리를 결심하며, 성찬 예식을 만들고 첫 성찬식을 집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깔뱅은 개인적으로 대학 여러 곳에서, 그리고 판사의 방에서 부요한 사업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제자들을 남겨 놓게 된다. 깔뱅이 쥬네브(제네바)로 가고 나서도, 서신 연락을 통해 고난받는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1555년 깔뱅은, 쥬네브에서 신학을 마친 쟈크 랑글라와를 쁘아띠에 교회 개척을 위해 파송함으로써, 그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소중한 역사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