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매주 월, 목요일 2회씩 연재되던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가 다음주부터 주 1회(목요일) 연재로 변경됩니다. 더욱 깊이있고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드리기 위한 조치이오니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에 더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꼴레쥬 상트 바흐브.

▲깔뱅이 다녔을 지도 모른다는 안내판.
깔뱅이 파리에서 다녔던 학교들을 찾아다니다가, 두번째 학교인 꼴레쥬 몽떼규 바로 옆에 위치하며 오늘날까지도 현존하는 한 학교를 찾아냈다. 1460년에 세워진 꼴레쥬 상트 바흐브(Collège Sainte Barbe)라는 학교로 이냐스 드 로욜라가 이 학교를 다녔으며, 프랑스 정부가 소개하는 역사 안내판에는 깔뱅이 이 학교를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좀 애매한 글이 있었다.

좀 더 정확한 자료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오래된 역사라 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깔뱅이 파리에서 만났던 첫 학교 스승인 마튀랭 꼬르디에가, 여러 학교(collèges de Reims, de Sainte-Barbe, de Lisieux, de la Marche, de Navarre)에서 가르쳤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깔뱅은 새로 전학온 꼴레쥬 몽떼규 바로 옆에 위치한 꼴레쥬 쌍 바흐보에서 강의하는 스승의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깔뱅은 마튀랭과는 계속 만나 계속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발레트 거리(Rue Valette).
이 학교가 있는 발레트 거리(Rue Valette, 당시 Rue Des Sept Voies)에는 여러 학교들이 있었는데, 사진 왼쪽으로 깔뱅이 곧이어 다니게 될 꼴레쥬 포흐테가, 맞은편에 꼴레쥬 바흐브, 그 앞쪽으로 꼴레쥬 몽테규가 있었다. 참고로 프랑스의 대부분의 학교들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깔뱅이 파리에서 다닌 세번째 학교 꼴레쥬 호얄(Collège Royal; 왕립학교)

부르쥬에 이어 오흘레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깔뱅은, 1531년에 왕립학교인 꼴레쥬 호얄[Collège Royal; 현 꼴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보다 심도 있게 어학 공부를 하고자 한다. 이 학교는 프랑수와 1세가 오흘레앙에서 학위를 마치고, 자연 과학과 철학, 역사, 신학, 법, 의학을 공부한 당시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인 르페브르와 함께, 수학을 가르쳤던 기욤 뷰데(Guillaume Budé 1467년-1540년)와 그의 측근 인문주의자들의 제안으로 소르본느 대학의 오랜 전통에 맞서는 대안으로 설립한 학교이다. 2개의 헬라어 과목, 히브리어 세 과목, 수학 한 과목 등 총 여섯 과목을 가르치는 왕실 학교이다.

▲인문주의의 전당 꼴레쥬 호얄.

이 학교의 설립자 뷰데는 로마 대사(1515년)로 있다가 귀국 후 언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왕립학교 건립을 준비하였는데, 국왕은 에라스무스에게 학장이 되어 준다면 천 권 이상의 도서를 제공하겠다고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추기경 제안도 거부한 에라스무스와의 협상은 이뤄지지 않고, 1530년에 학교가 세워진다. 바타블(Vatable)이 히브리어를 가르쳤는데, 깔뱅은 이곳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게 되며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현재 이 학교는 개방 대학이며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강의하는, 프랑스 최고 지성의 전당이다. 무엇보다도 오흘레앙 출신으로 세계 최초로 번역 이론 체계를 세우고 당시 개혁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다가 순교한 에티엔 돌레(Étienne Dolet 1509년-1546년)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이 대학을 통하여 프랑스 인문주의(人文主義)는 호기를 맞게 되었다. 언어학의 대가인 미셸 푸코가 이곳에서 교수로 역임했었다.

파리에서 다닌 네번째 학교 꼴레쥬 포흐테(Collège Fortet)

깔뱅은 파리에 다시 머무는 동안 꼴레쥬 몽테규 동문인 꼽 가문과 새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깔뱅의 사촌 올리베떵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동조하던 부유한 상인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Etienne de La Forge)의 집을 정기적으로 드나들게 되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 대한 박해 때문에 비밀리에 제라흐 후셀(Gérard Roussel)의 인도 아래 이 집에서 모였다.

▲꼴레쥬 몽떼규 시절의 깔뱅.

안타까운 것은 에띠엔느가 1535년 2월 15일 벽보 사건에 연류되었다는 혐의로 화형을 당하는데, 당시 나이는 5-60세 정도였다. 그는 벨기에 Tournai 출신으로 파리에서 오래 살았고, 부유한 상인으로 복음을 접한 후,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고 성경을 출판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학교도 세운다. 깔뱅이 자유파(les Libertins)를 반대하는 책 4장에서 “그를 기억하는 것은 축복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위한 진정한 순교자와 신자”라고 소개할 정도로 신실한 위그노였다.

깔뱅은 오흘레앙으로 가서 1532년 1월 14일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뒤 파리로 돌아오는 시기인 1533년경에, 꼴레쥬 호얄은 종교 개혁 지지자들과 가톨릭 보수파 교수들 간의 긴장이 증가되고 있던 시기였다. 파리에서 여러 집을 전전한 뒤 깔뱅은 마침내 포흐떼 대학(Collège Fortet)에 정착하였다. 현재는 대학 건물의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의사인 니꼴라 꼽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파리 대학’으로 소개되어 있는 꼴레쥬 호얄의 교장으로 선출되었고,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마튀랭 교회에서 로마 교회 역시 개혁에 참여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취임 연설을 열정적으로 한다.

니꼴라 꼽의 파리 대학 학장 취임 연설은 (마 5:1-12)에 관한 강해 설교였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0-11)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고백함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가? 사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순수하게 하려는 개혁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 악한 말을 하는 자,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견디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또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며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한 루터의 주장을 인용하여,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과 동시에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는 연설을 한다.

당시 교회들을 소유하고 있던 프렌체스코 파들은 즉각 꼽을 이단으로 비난했고, 몇 주 후에 꼽은 법정 출두를 받게 된다. 꼽은 학장임에도 왕이나 대학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파리 의회에 출두해야 했기 때문에, 고향 발(바젤)로 갔다. 깔뱅을 비롯한 12명 이상 되는 그의 친구들은 300 리브로의 현상금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꼴레쥬 포흐테의 깔뱅의 옥탑방.
깔뱅은 당시 꼴레쥬 포흐테 건물의 한 자취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깔뱅은 니꼴라 꼽의 연설문과 관련된 혐의를 받아 체포될 뻔했을 때, 옆집 지붕으로 도망가 엉굴렘(Agoulem)으로 피신하게 된다.

깔뱅 연구에 있어, 꼽이 작성한 연설문에 깔뱅이 참여했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깔뱅이 이 연설문에 연루되지 않고 단지 그날 강연에만 참석했다면, 1년 동안 피신하는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깔뱅이 이 연설에 연루됐던 것이라면, 깔뱅이 당시 이미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회심자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면 최소한 깔뱅의 회심 시점은 꼽의 연설문 사건 이전인 1533년 가을이 된다. 사실, 깔뱅이 언제 회심했느냐는 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민감한 부분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의 경우는 회심의 시기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 것이다. 

베즈가 “깔뱅은 1518년에 회심했을 것”이라고 언급한 이후, 많은 학자들은 “깔뱅의 글에서 회심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깔뱅의 회심은 니꼴라 꼽의 연설이 있던 1533년 전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 부르쥬에서 깔뱅의 활동에 관한 역사 자료들이 나오면서, 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부르쥬에서 회심하였을 것이라고 정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본인이 민감한 이 부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깔뱅이 부르쥬에서 개혁자로서 해온 활동이 묻혀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학자들은 깔뱅의 글에서 그의 회심의 흔적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저자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나 표현들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글보다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사람들의 증언이나 역사적 흔적들이 훨씬 더 유력한 증거이다. 

만약 깔뱅의 회심이 1533년 전후라고 한다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부르쥬에서 깔뱅이 벌인 개혁자로서의 활동이 프랑스 교회가 깔뱅을 우상시해서 만들어낸 역사 날조이거나, 날조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면 깔뱅 자신은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의 길로 사람들을 몰고 간 이중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깔뱅은 단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니고데모처럼,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사에 참석하며 사제직 수행과 성례시행을 거부하지 않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의 행태를 니고데미즘(Nichodemism)이라 불렀다. 깔뱅은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곧바로 공개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았지만, 깔뱅은 이 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와 충돌하지 않고 고요하고 안정된 개혁을 추구하려 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깔뱅은 1534년 쁘아띠에(Poitiers)를 방문하면서 미사가 아닌 성찬을 제정하게 되며, 쁘아띠에를 떠난 후에는 고향 느와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했고, 1537년부터 서신을 통해 니고데미즘의 ‘타협’을 경고하였다.
 

▲깔뱅의 방 현재의 모습.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