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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다

장석규 | 예영 | 216쪽 | 11,000원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국내에도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올레길의 모태가 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 생장피데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다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코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가는 800km를 말한다. 중세 이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거쳐갔고, 많은 이들이 삶을 변화시켰다는 고백을 남기는 곳이기도 하다.

“주님이 먹구름에 빛을 비추시면 저토록 아름다운 조명이 되어 명작을 만드는군요. 주여, 내 사랑하는 딸과 손자 시후가 지금 저 먹구름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빛을 비추시면 지금 앓고 있는 중병도 깨끗이 나을 줄 믿습니다. 온전이 회복되어 하나님 영광 드러낼 줄로 믿습니다.”

60세가 되면서, 다니던 직장을 뒤로 하고 ‘의미 있는 일’을 찾던 평범한 중년 남성이 있었다. 어느 땐가부터 ‘산티아고 순례’가 마음 한 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지만, 몇 년 전 무릎 재건수술 후 걷기 운동은 중단한 상태였다. 그 즈음 세 돌이 지났을 뿐인 외손자 시후는 다섯 번에 걸친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그를 돌보는 딸 또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병원과 집을 오갈 때 차를 운전해 주는 일 뿐이었다.

▲저자가 여정의 절반인 15일째 걸었던 길가의 돌밭. ⓒ예영 제공

외손자의 병세는 현대의학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고,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시후와 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걷기 기도라는 것도 있잖아. 그래, 가자. 걸으면서 기도하자.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기도하자.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못할 게 없어.”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다>는 군인 출신의 저자가 그렇게 ‘기도로 시작해 기적으로 끝난’ 산티아고 순례기이다. 딸과 손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 뿐 아니라 ‘예비 순례자’들을 위한 유익한 정보들도 군데 군데 심어놓았다.

예정보다 5일 앞선 30일 만에 800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그는 “네가 염려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라. 네 딸, 네 손자 시후는 또한 내 딸이고 내 아들이다. 그러니 내가 책임질 것이다. 대신 너는 감사한 마음으로 내게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음성에 3일간 89km를 더 걸어 ‘땅끝마을’로 알려진 피니스테라까지 걸었다.

▲19일차에 만난 지평선 멀리 무지개. ⓒ예영 제공

저자는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영혼의 자유와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평안을 느꼈다고 한다. 거기에는 문명의 이기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 주고,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 주는 그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타는 가슴으로 쓴 아내의 글들’에는 현실과 이 세상에 남겨진 이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결국 시후는 그가 돌아온 이후 어느 이른 아침, “엄마 졸려”라는 말을 남긴 채 영원히 잠들었다. ‘마치는 글’에서 저자는 시후를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한 달을 걸어 만난 산티아고 대성당. ⓒ예영 제공

“시후야! 산티아고 가는 카미노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내가 다 책임져 줄게’ 라고 하나님이 할아버지에게 말씀하신 뜻은 결국 ‘이제 시후를 아무런 병도 없고 고통도 없는 하늘나라로 데려다가 직접 돌봐줄 테니 너희들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하신 것이었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네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으니 이 할아버지의 불민함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가 말하는 ‘기적’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우울과 상실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너는 우리에게 참 소중한 씨앗을 뿌리고 갔다. 모든 가족이 힘든 가운데서도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며, 서로 힘을 북돋워줄 줄 아는 돈독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 주었다. 이제는 남들이 아파할 때 그들의 아픔을 머리로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며 함께 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무엇보다도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해서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3일을 더 걸어서 만난 해안가 벼랑 끝.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신 줄로 믿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립니다”라고 기도했다. ⓒ예영 제공

저자는 책의 판매 수익금을 뇌종양 어린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시후야! 이제 네가 우리에게 뿌리고 간 사랑과 관용과 믿음의 씨앗이 싹트고 잘 자라서 좋은 열매, 알찬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