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YMCA 회관, 당대 랜드마크
선교와 농촌 운동 외에 교육 주력
미술과 설치해 남녀 학생 모집도
6.25 이후 재건 힘쓰며 예술 진흥

서울 YMCA
▲서울 YMCA 강당에 운집한 사람들의 모습. 이 사진은 기요시 나카라이의 저술 <조선의 정부와 기독교의 관계(1921)>에 수록돼 있다. ⓒ구글
“새 회관은 서울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진고개의 천주교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훌륭하고 출중한 건물이다(J. S. 게일).”

1908년 서울 YMCA 회관을 준공하면서 선교사 J. S. 게일은 이 건물이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 건축물은 영국 건축가 퍼시 비슬리(Percy M. Beesley, 1875-1927)가 설계한 것으로, 미국 미시간주 앤 아버(Ann Arbor) YMCA와 상해 YMCA 건물과 마찬가지로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한국 신고전주의 양식의 또다른 예는 1928년 준공한 ‘구세군 중앙회관’이 있다. 이 예배당은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안정된 외관과 현관 앞에 거대한 기둥을 배치했다.)

이렇게 건립된 서울 YMCA 회관은 한일합방, 3.1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6.25, 건국, 민주화와 선진화 시기 등을 거치며 우리 국민들과 영광과 시련의 시간을 함께해 왔다.

초창기 한국 YMCA는 선교와 농촌운동, 스포츠 못지 않게 교육 사업에도 주력하였다. 교육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초대 회장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성숙해지면 개혁은 마치 태양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듯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것은 즉 교육 문제이다. … 이것이 서울의 입장이며, 서울에 있는 Y의 목적은 교육과 계몽과 설교에 두어야 한다(Korea Review, 1903).”

서울 YMCA는 초기부터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는 조선조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질서에 따라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기에, 직업교육 차원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했다.

전근대적 교육시스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용학문을 도입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공업부에는 목공과, 철공과, 인쇄과, 사진과를 설치했는데, 사진과의 경우 최창근과 G. A. 그래그(G. A. Gregg)가 책임을 맡았다.

공업부의 책임자 로이드 스나이더(Lloyd H. Snyder)는 유능한 기독교 시민을 키워 졸업 후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방침을 세웠다. 이런 배경 하에 사진과는 1927년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 신낙균을 영입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진 교육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기독청년회 사업과 관련하여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또 다른 예는 1920년대 중반 YMCA가 각종 사업을 활발히 펼칠 때 미술과를 설치하여 남녀학생을 모집한 일이다.

“조선의 수도 경성 안에는 아직까지도 미술에 유의한 사람도 많이 모여 살며 상당한 기술을 가진 미술가도 많이 모여 살건만 미술을 공부할 만한 학교도 없으며, 동양화는 연구회니 협회니 하는 강습소 같은 것이 있어서 불완전하나마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기를 길이 있으나 서양화나 조각같은 것은 아무리 한다 해도 할 수 없는 터이던 바, 이에 그 길에 유의한 사람들의 주석으로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학관에다가 미술과를 새로이 끼우게 되었다(‘청년학관에 미술과’, 동아일보, 1925.10.11).”

미술과가 공업부에 속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전공을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세 분야로 나누어 청소년들에게 동양미술사, 서양미술사, 원근법, 해부학 등을 가르치고 교수진도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이한복, 김창섭, 김복진을 초빙하였다.

서울 YMCA
▲신축된 서울 YMCA 건물 전경. 이 사진은 1908-1911년 사이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YMCA 아카이브 소장. ⓒ구글
수업 기간을 얼마 동안 했는지 불확실하지만, 실기와 이론을 균형 있게 이수토록 한 것은 단순한 교습소 이상의 성격을 띠었음을 알려준다. 김소연 교수는 청년학관이 ‘서화학원’이나 ‘고려미술원’과 같은 기관과는 성격상 구분되어 있어 전문적 연구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도 요구되었음을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미술과 수료자들로는 구본웅, 장기남, 양희문, 심영섭 등이 있다. 심영섭과 구본웅이 1930년대 미술계에서 서양화가로 두각을 나타냈다면, 장기남과 양희문은 김복진의 영향을 받아 조각가가 되었다. 그들은 당시 신인의 등용문이던 ‘조선미전’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구본웅, 장기남, 양희문은 모두 조각 분야에서 입선하는 성과를 나타냈다.

1927년 조선미전 조각부에 입선한 작가는 장기남, 양희문, 구본웅, 홍성덕, 안규응인데 이중 세 사람이 청년학관 출신들이었다. “조각에 있어서 점수로 일인측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실력에 있어서도 그래 보인다(“미전을 보고”, 조선 1927.5.30).”

이들이 본격적으로 실기를 한지 1-2년에 불과하며 아직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지만, 전국 미술인들이 경쟁하는 공모전에서 입선하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보다 앞선 시기 1919년 경성 시내 고등보통학교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화회’가 있었다. 당시 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서예와 동양화를 가르치던 ‘경성서화미술회’, 1915년 김규진에 의해 설립된 ‘서화연구회’ 등의 기관이 있었는데, 모두 전통회화와 관련된 곳이어서 서양화 지망생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조직된 것이 ‘고려화회’였다.

이 일에 발벗고 나선 사람은 고희동으로 추정된다. 그는 휘문·보성·중동 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중,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공부를 받도록 지원하였다. 재학생들로 구성된 만큼 기초조형 과정에 해당하는 석고 데생과 정물화 등을 배웠으리라 짐작된다. ‘고려화회’ 회원은 박영래, 강진구, 김창섭, 안석주, 이제창, 장발 등 12명이며 이후 구본웅, 홍재유, 이재상이 가입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YMCA는 전쟁고아 교육, 기독교 봉사, 여성 구호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통해 재건에 힘쓰는 가운데 예술인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한국 전통문화를 보존,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사랑방 클럽’을 조직한 것이나, 서울 YMCA 창립 60주년 때는 ‘미술초대전시회’를 열어 창립을 축하하고 그 의미를 기렸다.

‘사랑방 클럽(1965. 7. 29-31)’은 창립 이듬해인 1965년 YMCA 회관 2층 전시장에서 회원들의 소장품으로 이루어진 서화, 골동, 고와(古瓦), 의상, 장신구, 조각 등 80여 점을 전시했고, ‘미술초대전전시회(1963. 10. 28- 11. 3)’에는 서양화, 조각, 서예, 사진 등에 걸쳐 70여 명의 작가가 작품을 출품하였다.

또 YMCA 회관 내에 김은호의 <부활 후>와 장운상의 <동심>, 김기승의 휘호, 이상범의 <천산설야 위의 예배당>, 김정숙의 <힘의 군상>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초창기부터 YMCA 운동에 참여했거나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던 미술인들이 기증한 작품들이다.

서울 YMCA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희망인 인재를 길러내는 산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체험을 통해 미의식을 함양하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