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 장애인 시위
▲전장연의 지난 3월 충무로역 퇴근길 시위 모습. ⓒ크투 DB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7-19)”.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알리는 것이라기보다, 치료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사귀기를 꺼려했지만,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병에 걸리자 같은 처지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따지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 열 사람은 고통 속에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함께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던 것입니다.

몇몇 한센병 환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으려 할 때,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실 따름이었습니다. 거기에 담긴 뜻은 그들의 순종에 따라 믿음이 드러나고, 치료도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 믿음을 보여주고 병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 자신의 병 고침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그 분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다른 나병 환자들에 대해 평하시고 사마리아인의 믿음이 마음과 몸 모두를 건강하게 했다고 확인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에 대한 신뢰이며, 믿음의 한 부분으로서 감사 없이 믿음 생활을 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감사가 필요함을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나아가 하나님께도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전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서 장애인 권리보장 제도의 방향과 장애인 권리예산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않으면, 4월 21일부터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재개하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21년간 기다렸기에 지금은 검토가 아니라 결정하고 책임을 다할 때라며, 대통령 인수위원회의 신속한 결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그들은 시위부터 하려고 합니다. 21년간 참았으면, 산적한 현안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새 정부를 배려할 수 없었을까요? 특히 코로나19로 나라 경제와 국민들 삶은 엉망진창이 됐는데, 자신들의 요구 조건 때문에 시민들의 발목을 붙잡아 고통을 주어 피해를 입히는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배후를 밝혀 척결해야 할 것입니다.

지하철 이용 승객들 중에는 급한 용무가 있는 분들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간 맞춰 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분들도 분명 많을 것입니다.

특히 수많은 직장인들의 지각 사태가 업무에 얼마나 지장을 초래했을지 모릅니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니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만, 기업과 직장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돈입니다. 전장연은 그 피해를 책임지고 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다리를 저는 분들이 지나가면 도와드릴 일이 없나 싶어 한참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면 목적지까지 들어드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라가 가난해 먹는 문제도 해결 못하던 시절이라,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거리마다, 시장마다, 지하철마다, 심지어 관광지마다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복지가 잘 되고 기술이 발달해, 장애인들의 상태에 따라 각종 장비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옵니다. 장애인들도 행복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필자가 사는 곳 부산에도 ‘두리발’이라는 장애인용 콜택시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 택시도 장애인들을 저렴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장애인 환자들을 위해 요양보호사들이 파견돼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불평불만으로 세월을 낚는 장애인들이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산등성이에 있어 경사가 꽤 심합니다. 그래서 노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마을버스 노선을 회복시켜 달라고 10년째 신문과 TV, 국민신문고에 알렸지만 지금까지 해결이 되질 않고 있어 참으로 답답하지만,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 사는 장애인들 역시 마을버스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물론 장애만을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고 불평불만만 제기한다면, 자신의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질 않을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 역시 감사하는 생활이 전부였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필자 역시 장애인입니다. 정들었던 회사를 은퇴한 후 장애인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하고 싶어 장애인협회를 찾아가 회원으로 등록한 후, 아이디어를 열심히 제공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고질적인 병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비록 장애인일지라도 마음만은 따뜻해야 한다, 마음만은 장애인이 아니다’고 늘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장애인들을 향한 메아리일 뿐, 실천이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잔머리만 굴리는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이용하려는 모습,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간질을 하며, 장애인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일, 서로를 믿지 못해 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을 보면, 실로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 친구와 회식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제 주위에 팔이 하나씩 없는 여성 장애인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겹살은 우리가 구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장애인 친구와 함께 열심히 삼겹살을 구웠습니다.

삼겹살을 굽자마자 그 여성 장애인들의 입으로 삼겹살이 들어갑니다. 하도 맛있게 잘 먹어서 우리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여성들이 “아 잘 먹었다” 하며 유유히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삼겹살은 다 없어진 후였습니다.

고기를 굽는 사람에게 먹어 보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 자리를 떠나가는 여성 장애인들을 보고, 친구와 저는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이기적일까요? “우리가 한쪽 팔이 없어 고기를 구워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잡수시면서 하세요!” 말 한 마디 없이, 홀짝홀짝 다 먹어 치우는 인정머리 없는 모습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장애인협회장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 폐휴대폰을 모으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우리 구 관내 아파트, 교회, 성당, 절, 학교, 경찰서, 동사무소에 이어, 타 지역까지 폐휴대폰 박스를 만들어 설치해 수거하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400-600개의 폐휴대폰을 수거해 가며 힘들게 장애인협회를 위해 일했지만, 점심시간 장애인들을 만나면 자기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필자에게 밥을 먹었나며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는 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필자가 장애인의 날을 맞아 부산시장 표창을 받던 날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피어오릅니다. 각 구청마다 한 명씩 시장 표창을 받는데, 우리 구 장애인들은 표창을 받는 사람에게 박수는커녕, 점심 도시락과 기념품 챙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상을 받고 나오는 필자에게 눈 길조차 주지 않고 챙기기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의 평상시 행동도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저 공짜로 얻으려는 마음만 가득합니다. 피땀 흘려 노력하려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장애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홀로 서서 아름답게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장애인들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늘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의 아픈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한센병 환자 아홉이 어디 갔느냐?”고 안타깝게 찾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다 이룬 후, 사라져 버렸던 아홉의 환자들이 되지 말고,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전한, 한 명의 구원 소식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시민들의 발을 묶어, 자신들의 목적은 물론 이익을 챙기려는 전장연 같은 단체들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이들은 장애인들을 이용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장난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장애인들을 차별해선 안 되겠지만, 장애인들도 “나는 결코 장애인이 아니다”는 마음으로 인내를 갖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복지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특히 장애인들도 행복한 시대입니다. 오히려 비장애인들보다 더 잘 살고 있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수급자가 아닌데도 위장하여 각종 혜택을 누리는 자들도 많습니다. 정부는 탁상공론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자들을 빈틈없이 걸러내 엉뚱한 곳으로 국민 세금이 새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정 넘치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유년 시절 무척 가난했던 기부의 대가 록펠러는 “받는 자보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느 복음서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이 말씀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 정신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받고 감사하면서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