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할머니는 손자에게 잔잔히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너도 이제 이런 이야기를 들어둘 만한 나이가 되었구나. 순조 임금님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때의 일이란다. 홍경래라는 사람이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 뭐냐."

"왜 그랬나요?"

"그건 말이지.... 그때는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벼슬아치란 벼슬아치들은 모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었단다. 늘 눌려 살던 백성들이 점점 살기가 힘들어지자 참지 못하고 그만 울분을 터뜨리게 되었지."

"아,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켰군요?"

"그렇단다. 이런 기회에 부패한 벼슬아치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목숨을 걸고 나섰던 거지."

"그렇다면 홍경래도 나쁜 사람이 아니지요?"

"불쌍한 백성을 위해 싸운 의로운 사람이었지.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누가 나서서 서러운 백성의 울분을 풀어 주었겠느냐. 그렇지 않니?"

할머니의 반문에 어린 아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할머니는 향하여 다시 물었다.

"할머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호기심이 발동한 검은 두 눈이 반짝였다.

"홍경래 장군은 백성 군사를 두 부대로 나누어 먼저 가산 관청을 습격하고... 곧이어 성난 파도처럼 평안도의 여러 고을을 휩쓴 다음... 얼마 후에는 곽산은 물론 이곳 정주까지 손아귀에 넣어 버렸단다."

"오, 대단하네요!"

"허지만 서울에서 군사들이 내려와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사정은 역전되고 말았단다. 백성 군사는 정부군에 비하여 워낙 무기가 빈약했기 때문에 계속 밀려나기 시작했지. 마침내는 점령했던 고을을 다 내어준 후 이곳 정주로 모여들게 되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놀라지 말거라. 백성들의 군사는 거의 다 죽음을 당하고 집들은 불타서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말았단다. 그 후 정주는 폐허가 되었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고을이 되어 버렸지.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차츰 사람들이 모여들어 옛 모습을 겨우 되찾게 되었단다."

그 후 서북지역에 대한 경계와 차별은 더욱 심해졌으며, 이에 따른 주민들의 반감도 커져 갔다. 그리고 정주는 '반역의 고장'이라 하여 한동안 무시를 받았다.

그 지역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해 관리나 양반으로 출세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그 대신 상공업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업과 공업을 천시했지만, 신분과 직업을 별로 따지지 않는 이 지역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만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으며 자립심도 남달랐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마친 후 시름 겨운 한숨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는 어린 아이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새겨 놓았다.
 
여섯 살 때 이석주는 어머니와 두 아들을 데리고 정주에서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를 했다. 납청정은 정주에서 동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살 길이 막막하여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간 셈이었다.

납청정은 원래 정자 이름에서 온 것인데, 이 정자에 오르면 하늘과 구름 사이에 한 점의 속됨도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 밖에 있는 청정한 빛이 모두 이 정자에 비치게 된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정자의 이름이 이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당시 납청정은 놋그릇 제조업의 중심지였고, 서울에서 의주로 통하는 큰길가의 시장통이기도 했다. 서북쪽으로 연봉과 묘두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고, 거기서 흘러 내리는 맑은 냇물이 중심지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경치도 아름다웠다.

특히 이곳에서 제조되는 놋그릇은 아주 유명하여 평안도는 물론이고 멀리 황해도와 함경도까지 판매망이 넓혀져 있었다.

승훈의 아버지 이석주는 그곳에서 조그마한 약포 한 곳을 맡아 일하였고, 유기공장에서 새로 만들어진 그릇들을 내다 팔기도 했다. 그는 두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시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당에 보내어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글을 배우도록 했다.

하지만 어린 승훈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책과 종이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책은 다른 아이의 것을 함께 보면서 배웠고, 글씨는 '주판'이라는 것을 들고 다니면서 손가락으로 쓰곤 했다.

주판이란 네모난 나무그릇에 모래를 담은 것으로, 그 모래를 얇게 펴서 깐 다음 그 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 후 흔들어 지운 다음 다시 쓰곤 하는 학용품이었다.

훈장은 승훈이 월사금을 내지 못해도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얘는 종이조각만 보면 주워서 글을 쓰거든. 아마 이 애 앞에는 흰 나비도 지나갈 수 없을 거야. 그것도 종이조각으로 알고 글을 쓸테니...."

그 대신 다른 아이들이 농땡이를 칠 때마다 이런 말로 훈계했다.

"이놈아, 승훈이가 공부하는 걸 좀 보아라. 너보다 훨씬 어리지만 공부는 물론 행동까지도 단정하지 않느냐. 제발 좀 보고 배워라."

그러면 승훈은 겸연쩍은지 얼굴을 붉혔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