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이 2월 8일 서울 석촌동 언약교회에서 전할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제가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주일 은퇴한 다음 지난 7년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석촌동 언약교회에 네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여기 와서 2008년 11월 2일 주일 “아가페의 사랑과 에로스의 사랑”, 2011년 7월 3일 주일 “감사는 행복의 비결”, 2014년 6월 1일 주일 “주일 성수와 몸을 드리는 예배”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오늘 2015년 2월 8일 주일 여기 다시 와서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김만영 목사님이 “전도와 섬김”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는 말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창한 설교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통 진리 선포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닌 사람의 섬김의 삶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섬김”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열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유창한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정통 진리를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 기도 소리를 들은 강도 한 사람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한 강도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향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도 놀라고 로마 군인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예수님이 정말 의인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아마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평생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와 같은 귀중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중한 설교를 유창한 말로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에서 우러나온 삶의 고백이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권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또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 삶과 사역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착한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하라고 하면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생명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다가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착함과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가이사랴에 살던 백부장 고넬료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함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착함과 섬김의 삶과 사역” 덕분에 예루살렘과 욥바와 가이사랴와 빌립보에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40).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루디아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14절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행 16:13-14).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교제”와 “섬김”과 “기쁨”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사실 강변교회의 모델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이기풍 목사님은 함께 제주도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정양순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이나 감동적인 설교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든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 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과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착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섬김의 삶을 살고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사역을 하려고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5개를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4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 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세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14장(새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1절을 두 번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