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 무슬림의 프랑스 언론사 테러에 이어 IS(이슬람국가)의 일본 크리스천 언론인 ‘참수’로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본지는 이동주 박사(사진·선교신학연구소장)가 ‘무슬림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을 게재한다. 이동주 박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각각 이해시키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 -편집자 주

서론

필자는 그동안 세계 복음화에 가장 도전이 되고 있는 아시아 종교 연구에 집중하다, 세계 이슬람이 2025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려 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법(샤리아)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서둘러 사실 여부를 살펴 보니, 실로 여러 명의 무슬림들이 한국 사법계과 법조계까지 들어가 해마다 여러 차례 강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교회가 무관심한 사이, 무슬림들은 발빠르게 이란의 사법부 수장인 아야톨라 마흐무드 하세미 사루다까지 모셔와 사법연수원에서 강의하게 했다.

실상을 알수록 필자는 이 외래종교에 무관심한 한국교회를 일깨우고자, 서둘러 변증적 연구발표를 해 왔다. 그러나 이제 여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이슬람의 실체를 밝히는 좋은 자료들을 공개하고 있으므로, 이제 본연의 관심과 사명감으로 무슬림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이 논문을 쓰게 됐고, 설교 제목과 비슷한 이 논문 제목이 설득력 있을까 하는 의혹과 동시에 소원을 품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필자는 한편으로는 아직 여러 기독교인들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무엇인지를 이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을 믿고 또 어떻게 믿게 되는지를 이해시키고 싶다. 그리고 무슬림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 죄와 탐심으로 얼룩진 구제불능의 인간들을 찾아와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전하고, 모든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과 결과에 관해 이슬람교의 경전과 토론하며 성경과 복음에 대한 무슬림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다.

논문의 내용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슬람교의 오해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하나님 사랑의 본질, 사랑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타락한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에 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다시 확언하는 바는 무슬림들도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우리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복을 노래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필자는 무슬림 구도자들이 이 논문을 접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기를 소원한다. 논문 내용은 하나님 사랑을 중점으로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에 관해 다루게 된다.

1. 하나님은 누구신가?

요한일서 4장 8-11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증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사랑 때문에 남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6-27). 또 가족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시고(신 6:5, 요 3:16, 요 21:15-17),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신다(신 6:5).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그러나 꾸란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일도 없고 또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여 질문하는 것도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어도 알라 또는 꾸란에 질문을 할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에, 늘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채 살아가고 있다.

“믿는 자들이여 분명한 것은 묻지 말라 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해롭게 하느니라. 또한 꾸란이 계시되는 것을 묻는다면 이는 더욱 너희들에게 해악이라… 너희 이전의 한 무리가 그러한 질문을 하였으니 그들은 그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되었노라(Sura 5:101-102)”.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선지자 호세아가 전한 말씀처럼 멸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저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1.1. 무슬림들의 ‘삼위일체’ 오해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을 하나님-성모 마리아-예수라는 세 분의 신으로 오해하여, 극악한 신성모독죄(쉬르크)로 여기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신(神) 개념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 무슬림들이 기독교가 세 분의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아래와 같이 꾸란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란은 알라 앞에 올라간 예수에게, 알라는 예수 자신과 그의 어머니를 숭배하게 하였느냐고 질문하고,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네가 백성에게 말하여 하나님을 제외하고 나 예수와 나의 어머니를 경배하라 하였느뇨 하시니, 영광을 받으소서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으며 그렇게 할 권리도 없나이다. 제가 그렇게 말하였다면 당신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Sura 5:116-117)”.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 (Sura 5:73)”.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Sura 4:171)”.

꾸란은 세 분의 신으로 오해한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무함마드는 대상으로 여행 중에 시리아에서 아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 신학에 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게 되고, 그 한 예로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고 오직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의 피조물이라 주장하는 바를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면 신성모독죄로 판정 받음으로써, 무슬림들은 오늘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무함마드는 에비온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무함마드 출생 이전 많은 아라비아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에티오피아, 시리아 배경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소그룹들이었다. 이러한 그룹에서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발견한 무함마드가, 이를 우상숭배로 정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단종파’가 아니고는, 어떤 기독교인도 꾸란과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삼위일체, 즉 성부-성모-예수로 믿고 있지 않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이단으로 정죄받고 이주해 온 많은 이단들이 있었다. 그 중 에비온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인정해 다만 위대한 예언자로 믿고, 바울서신을 배척하고 할례를 행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라’라고 칭하는데, 꾸란에서 기독교인들을 칭하는 바와 동일하다

1.2. 하나님은 삼위일체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위의 성경 원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단 한 가지 유언이다. 그 유언의 내용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이다. 그 ‘이름’이라는 그리스어 중성명사는 삼인칭 단수명사인 “그 이름” τὸ ὄνομα로 되어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인 삼위일체란 본래 어떤 하나님인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학교 교수 김정주는 논문에서 성령을 하나님 자신의 영이라 논증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수의 신이 아니고 유일한 신으로서 구약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지 연구하였다. 그의 저서 『바울의 성령 이해』에서 구약의 유일신적 삼위일체의 ‘하나’에 관해 뛰어난 연구를 했다.

그는 구약에서 ‘하나’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발견하였다. 신명기 6장 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의 구절에서, 복수적 개념의 의미를 담은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 복수적 의미를 품은 ‘하나’는 단일성 개념인 ‘하나’와 구별된다. ‘야히드’는 창세기 2장 2절, 스가랴 12장 10절과 같은 ‘독자’를 위한 개념으로써 단일성을 나타내는 ‘하나’이다. 그러나 ‘에하드’는 에스겔 37장 17절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될 때’, 또는 한 남자가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때(창 2:24) 사용되는 복합적인 ‘하나’이다. 그러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어가 왜 2인칭 복수대명사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창 1:26).

압둘 마시흐는 세속적인 사람을 위해서 흰자와 노른자와 껍질로 되어 있는 계란이나 삼각형 또는 삼분설적 인간론 등을 예로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은 공동체적 본질이다. 이 사랑의 본질이 인간과도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셨으며,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셔서 결국 인간과 ‘임마누엘’ 공동체를 이루시고, 인간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전인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신 6:5).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신비로운 것이기에, 마르틴 루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유를 그의 『소요리문답』 (Der Kleine Katechismus)에서 아래와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나의 이성으로나 나의 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거나 그에게 나아올 수가 없다. 내가 주를 믿는 것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사로서 깨닫게 하시며 올바른 신앙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또 지키시기 때문이다.”

에밀 브룬너 역시 성령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임을 아래와 같이 증거하였다. “성령을 받는 것은 높임 받으신 살아 계신 주를 만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자를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위의 루터나 브룬너의 예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에 대한 지식 등은 인간의 사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심을 믿고 회개함으로 받은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행 1:8, 행 2:38, 고전 12:3).

1.3. 하나님은 아버지인가?

꾸란은 알라 외의 모든 존재는 예수를 포함하여 다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직 노예일 뿐(Sura 19:93)이고, 예수 그리스도조차 알라의 노예라고 증거한다(Sura 4:172). 종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또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도 아버지도 없다(요일 2:23). ‘종’은 하나님을 오직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요 15:15).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용서 받은 일도 없는 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로부터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무슬림들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영혼을 ‘적그리스도’라는 가장 비참한 영혼으로 묘사된다.

성경은 신명기 32장 5-6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친다. 우리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의 본래적인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라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이사야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내 영광을 위해서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딸들”이라고 호칭한다(사 43:6f). 또 딸 시온(사 1:8), 딸 애굽(렘 46:11), 딸 바벨론(렘 50:42), 딸 암몬(렘 49:1-4), 처녀 이스라엘(렘 18:13), 처녀 유다(애 1:15), 처녀 예루살렘(애 2:13), 처녀 에돔(애 4:21), 처녀 애굽(렘 46:11) 등과 같이 일컫기도 하고, 그의 백성을 아내나(사 54:6) 신부로(사 62:4f) 칭하기도 하며, 하나님을 남편으로(사 54:5; 렘 3:8, 14, 렘 31:32), 아버지로(사 64:8; 렘 3:19), 어머니 같은 하나님으로(사 66:13) 보여주기도 한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과의 사이를 아버지와 죽은 자녀의 관계로(눅 15:24), 하나님과 새로운 피조물과의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요 1:12; 요일 3:1) 일컫기도 하고, 종이 아니라 자유한 아들로(갈 4:28-31), 하나님의 양자로(롬 8:15), 징계받는 아들로(히 12:5-9),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로(마 25:1), 아내로(계 10:7) 대우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묘사는 인간 신격화의 관계나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친밀성 개념이다. 아래 말씀과 같이,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묘사와 같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과 회복된 피조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1:13)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이 신적 본질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12절 말씀과 같이 사랑의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놀라운 권세라는 것이다(요 3:16). 즉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들 같이 대해주시는 것이며(히 12:7),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이 양자로 삼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하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구약과 신약에 약속된 대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로 알게 되는 것이다(욜 2:28-29, 행 2:38, 요 14:16f).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과 아들에 대한 신앙도 오직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죄를 용서받은 경험도 없고, 성령을 받은 일도 없는 무슬림들은 성경의 말씀들을 육적이고 물질적으로 읽어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가족 공동체가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이므로, 이 모든 은총의 관계 개념을 육적이고 물질적으로 오해한다.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다가가 선교해야 하는 것은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속히 그들에게 달려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다. <계속>

/이동주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은퇴, 선교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