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베딕트 선교사(유스미션 대표)는 청소년에 대한 열정과 전문성, 그리고 독특한 유머를 겸비했던 몇 안 되는 청소년 사역자 중 하나였다. 한때 국내에서 수많은 집회 인도와 각종 강연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그였지만, 최근에는 좀처럼 그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가 현재 미국에서 신학 공부 중인 것을 알게 됐고, 이메일을 통해 직접 근황을 전해들을 수 있다. 아래는 그가 보내온 글을 일부 수정을 거쳐 옮긴 것이다.

▲원베네딕트 선교사. ⓒ유스미션 제공

여름방학에 12학점을 신청했더니…

미국에 와서 공부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지만 그래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복되고 은혜인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Seminary)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국장로교회(PCA)의 교단 신학교인데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좋은 학교입니다. 이곳에서 목회학(M.div.)과 종교문화(M.ARC.)를 복수전공하고 있고 올해 공부가 끝납니다.

지난 3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만 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4-5년 걸리는 과정인데 매학기 남들보다 학점을 더 많이 듣고 여름방학에도 쉬지 않고 계속 수업을 들으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한번은 여름방학 학기에 12학점을 신청했는데 학교에서 절 부르더군요. 이유는 이렇게 공부하면 가족과 보낼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학교가 가진 장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저는 올 가을에 목사안수를 받을 계획이고 이번 여름부터 신학석사(Th.M.) 과정을 시작해 내년 여름에 끝낸 뒤 바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사실 Th.M. 과정을 1년에 끝내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이렇게 공부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고, 또 이것이 학교에서의 저의 마지막 공부일 것 같아 최선을 다해보려 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젊은이 사역에 대한 저의 관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사역은 선교단체가 아닌 교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글은 얼마 전 젊은이 사역과 교회를 생각하며 쓴 것입니다.

두 엄마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읽고 들을 때마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감탄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어머니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여자의 직업은 몸을 파는 창녀였고, 이들은 3일차로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는 자면서 아들 위에 눕는 바람에 아들이 질식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부주의로 아이를 죽였음에도 미안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자신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실수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여자의 아들을 빼앗아 오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엄마 품에 잠든 아들을 데려다가 자신이 마치 엄마인 양 행세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은 아들은 그 여자의 품에 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도 없는 여자가 아들을 하나 소유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에 대한 소중함도 사랑도 없는 여자는 그저 자신도 아들을 가진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잠에서 깬, 산 아이의 엄마는 옆에 누운 아이가 죽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로 압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신의 아들이 다른 여자의 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만 그 여자는 거부합니다. 증인도 없고 또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에 누구의 아들인지 밝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여자는 솔로몬 왕을 찾아가 판결을 부탁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칼을 가져다가 반을 잘라 서로에게 나누어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산 아들의 엄마가 되는 여자는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정을 말합니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산 아이를 그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산 아이의 엄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짓말한 사람이 되기로 결정합니다. 남의 아들을 도둑질한 부도덕한 여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을 자기의 실수로 죽이고 다른 집의 아들을 빼앗아 온 여자는 “자신의 것도 되게 말고 저 여자의 것도 되게 하지 말고 나누라”고 말합니다.

이미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자신을 살리려는 엄마에게 맡겨져서 양육되어야 합니다. 아이를 죽여도 된다고 말하는 여자는 엄마가 아닙니다. 설사 그 여자가 진짜 엄마라고 해도, 그렇게 말하는 여자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두 여자의 직업은 몸을 파는 창녀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실수로 죽이고, 남의 아들을 훔쳐와서는 이제 남의 집 아들까지도 죽이려고 한 여자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닌 몸을 파는 여자, 즉 창녀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칭 중 하나가 바로 ‘엄마’입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들을 살리려고 했던 여자는, 이전에는 몸을 파는 창녀였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그 아이에게 엄마로 불리게 됐습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다 똑같지 않습니다. 아들을 살리려는 엄마가 있고 아들을 죽이는 엄마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왜 ‘큰 교회’가 되려고 할까요?

저는 이 두 종류의 엄마에 대해 묵상하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교회학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교회와 목회자가 있을 수 있고, 아이들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교회학교와 교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던 여자처럼, 영혼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불타는 사랑을 가진 교회학교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여자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태어난 어린 아이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분명 영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와 교사는, 아이들에 대한 불타는 모정과 같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산 아들의 어머니에게 아들을 향한 마음이 불붙은 것처럼, 교회 역시 영혼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이 붙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겐 어린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들을 훔쳐다 자신의 아들로 만들려 하고, 그 아들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산 아들의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 옆에 누워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지 알아본 것처럼,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너무 커져서 누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목회자와 교사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의 이름조차 알 수 없고,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목회자와 교사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 다른 슬픔입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남의 집 아들을 훔쳐왔던 그 여자처럼, 어쩌면 지금 교회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으려고 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없는 이상한 단어들을 쓴 전도법들을 개발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교회는 왜 큰 교회가 되려고 할까요? 교회는 왜 성인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진 반면,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많이 없는 걸까요? 영혼에 대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일까요?

교회는 영혼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영혼은 고구마가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교사는 진돗개도 아닙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 지나친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교회는 아이를 빼앗기더라도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 했던, 그래서 자기가 희생하려고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를 쪼개라고 솔로몬 왕이 명령할 때, 한 여자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다른 여자의 것도 되게 말고 나누라”고 말합니다. 쪼개는 것은 결국 아이의 죽음입니다.

내 소유가 되지 못한다면 아이를 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소유하려는 욕심은 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살리려는 사랑은 나를 희생합니다. 교회를 위해 양떼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교회가 희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으로 인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다투고 분열하고 쪼개질 때 그 동기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가짜 엄마는 아이를 쪼개서 내 것도 다른 사람의 것도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주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금 우리는 남의 아이까지 도둑질해서 내 아이로 삼으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의 집 아이를 훔쳐온 가짜 엄마는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이든, 중고등부 교사이든 아니면 교회의 장로이든, 목회자이든 나에게 맡겨진 영적인 자식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진짜 엄마의 마음입니다. 자식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명이 모이든 상관 없이,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는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애쓰는 진정한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열광적 찬양과 무대의 조명만이 아닌…

이것이 이번 여름 사명캠프를 위해 준비하는 유스미션의 기도이며 마음입니다. 수련회가 일종의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결심입니다. 흥미 위주의 집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열광적인 찬양과 무대의 조명으로 아이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아이라, 비록 며칠 안 되는 수련회지만 올바른 말씀을 통해 아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이번 여름에 유스미션에서는 두 번의 사명캠프를 진행합니다. 한 번의 집회는 2박 3일이고 다른 집회는 3박 4일로 진행합니다. 2박 3일의 사명캠프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집회로 기존과 같이 많은 인원이 참석하게 되겠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3박 4일의 사명캠프는 말씀 사경회로 진행합니다. 부수적인 다른 프로그램들을 배제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아마도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참여가 가능한 집회가 될 것입니다. 단체보다는 개인, 그리고 대학 청년들과 가족분들이 참석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원도 300명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강해 설교가 진행됩니다.

한반도의 젊은이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라! 백성을 사랑하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원베네딕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