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한 친구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오늘부터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그리고 바람도 안 피우기로 했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그럼, 자네는 오늘부터 무슨 재미로 사나?”

“그거야…,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지.”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세상에는 ‘죄 짓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 죽이는 재미’로 살아야 한다. 죄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죄와의 인연을 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존재, 보배로운 존재로 불러주셨다(벧전 2:9).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다. 원래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의인은 죄에게 종노릇할 수 없다(롬 6:6-7).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존재이다(롬 6:11).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쓰시는가?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딤후 2:21).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자기를 깨끗게 하라.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다. 죄와의 싸움이다. 죄가 다스리는 세계와 싸워야 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우리는 율법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은혜 아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존재이다. 은혜 안에 살아가는 법을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날마다 죄를 미워해야 한다. 증오해야 한다. 거부해야 한다.

존 오웬이 쓴 <현대인을 위한 죄 죽이기>란 책이 있다. 그는 “죄와의 전쟁에 휴전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히 12:4). 우리가 치열하게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죄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이다. 내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가? 망가지기를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죄를 죽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죄에게 자꾸 먹이를 던져준다. 죄는 먹이를 주지 않아서 굶겨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굶겨 죽여야 한다.

‘두더지 죽이기’ 게임을 생각해 보라. 두더지들은 한 번 치면 죽는 시늉을 하고 얼른 땅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결코 영원히 죽는 법이 없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내민다. 제 아무리 힘껏 내리쳐도 금세 다시 올라온다. 두더지들은 서서히 게임을 하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두더지들과의 싸움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죄가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오히려 ‘하나님의 관찰’에 예민한 삶을 살아가라. ‘법정’의 유죄판결에는 몸을 떨기보다, ‘하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라. 그래야만 죄와 한 판 붙을 수 있다.

죄란 놈은 아주 사악한 존재이다. 아주 은밀하게 움직인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린다.
‘누구신가요?’

‘나는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여인의 연약한 음성이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소!’
‘사랑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소녀입니다.’

‘이름이 뭐요?’
‘제 이름은 죄악입니다.’

‘그러면 어서 들어오시오.’
그 순간, 내 마음의 방은 지옥으로 가득 찼다….

죄는 달콤하게 다가와서 우리를 파멸의 늪에 빠뜨린다.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삶 속에 파고들어 인간을 파멸시킨다. 그렇기에 죄의 유혹의 손짓에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 죄는 전염성이 강하다(갈 5:9). 적은 것이라 깔보지 말라. 순간에 정복당한다. 삽시간에 오염된다. 온 덩이를 순간적으로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죄의 누룩을 간과하지 말라. 작은 틈만 보여주어도, 교묘하고, 끈질기게 파고든다.

누구도 방심할 수 없다. 위대한 영적 거장 다윗도 이성적인 유혹에 넘어졌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인간적인 정에 넘어졌다. 예수님께 그렇게 신임 받았던 가룟 유다도 돈의 유혹에 무너졌다.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사단의 유혹을 못 이기고 죄를 지어 죽임을 당했다.

강화도는 ‘벤댕이’가 서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죄’가 서식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과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소극적인 면에서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를 짓는데 내주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 6:13).

어느 날 두 여자가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

한 여인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이 있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여인은 떳떳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한 여인에게는 큰 돌 열 개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또다른 여인에게는 작은 돌 여러 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자 두 여인은 돌을 가져왔다. 현자는 여인들에게 다시 말했다.

“들고 왔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오시오.”

큰 돌을 들고 왔던 여인은 쉽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런데 여러 개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원래의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가 그들에게 말했다.

“크고 무거운 돌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기억할 수 있어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있소. 그러나 수많은 작은 돌들은 원래의 자리를 잊었으므로 다시 가져다 놓을 수가 없소.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요. 큰 돌을 가져온 당신은 한때 당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고 양심의 가책에 겸허하게 견디어 왔소. 그러나 작은 돌을 가져온 당신은 비록 하찮은 것 같아도 당신이 지은 작은 죄들을 모두 잊고 살아온 것이오. 그리고는 뉘우침도 없이 죄의 나날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졌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죄는 이것저것 말하면서 자기가 죄에 더욱 깊이 빠져있는 것은 모르고 있지요.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라오.”

남의 죄를 찾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찾기에 두 눈을 부릅뜨라. 내가 불의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가를 점검하라. 죄와의 전쟁은 휴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