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원시 사회는 인간의 성격과 자연환경 모두에 공통되는 에너지를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말들은 그들의 사고 속에는 널리 퍼져 있으나, 우리의 정상적인 사고 범주로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아프리카 오지의 마사이 마라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마을 촌장으로부터 몇 가지 단어를 반복해서 발음해 보도록 권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그 단어를 똑똑하게 반복해서 발음하는 동안 ‘나’라는 주체와 객체인 그 말이 하나의 공통되는 힘과 에너지로 연결돼 마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원시사회의 ‘주문’과 ‘주술’이 문학의 범주에 들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주문과 주술에서처럼 문학에서도 단어를 사용하는 데는 잠재적인 마법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문학의 언어가 능력과 역동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문학적 매력을 더해주었다.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개념은 시적 은유다. 은유의 개념은 “이것이 그것이다”는 형식을 갖는다. 성서는 단어를 특별한 종류의 부호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시적 은유다. 물론 플라톤 이전의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호메로스의 작품도 그렇다. 시적인 언어는 원시 종교의 개념으로 보면 마치 마나(mana),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의 원시종교 개념처럼 사람이나 사물에 스며들어 마력을 발휘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다. 그런데 성서는 태초에 스스로 존재했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의 언어가 지닌 힘은 그 스스로 생성하고 번성한 창조력이다. 창조의 능력이란 그 말을 함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힘이다. 다시 말하면 말을 하면 그대로 되는 말의 위력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3-6)

우리는 전투의 영웅을 주제로 다룬 문학작품에서 전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뽐내는 말을 함으로써 그가 원하는 힘을 얻는 장면을 본다. 이처럼 말을 소리내어 했기 때문에 발휘되는 준 물리적 힘의 의미를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사사기 11:35)” 입다는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제물로 여호와께 바친다. 이는 언어가 발하는 위력이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성서의 이 내용이 수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고 민담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마법과 주술로 인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서 말씀은 의식을 통해 읽혀질 때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초월적인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고, 양자가 공통되는 에너지의 형식이 있는 곳에서는 그 언어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송영옥 박사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 정회원이다. 수상집 ‘미운 남자’, ‘하늘 숲’, 영한시집 ‘The Womb of Life(자궁의 그림자)’와 세계 문화 예술 기행집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까지’, ‘이 지구를 떠돌고 싶다’, 문학에세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을 두 차례 역임했고, 전 세계 60여 개국을 돌며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