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어린 시절에는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시간, 밤 7시가 되면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즘 같이 시계가 흔한 시절이 아니라, 믿지 않는 분들도 ‘아! 벌써 7시가 되었구나’ 하면서 ‘댕그랑, 댕그랑’ 종소리에 맞춰 ‘천당, 지옥’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후 종소리가 사라지고, 찬송가를 들려주는 종소리가 나왔습니다. 무척 아름답고 좋았지만, 시끄럽다는 민원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금요일에는 구역 모임이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방에 팽개치기 무섭게 곧장 구역 식구들 집으로 일일이 찾아다니며, 오늘은 누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니 꼭 참석하시라고 외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더러 ‘부구역장이 왔네!’ 하시면서 ‘오냐! 꼭 참석하마’ 하시던 기억이 새롭게 피어오릅니다.

저는 구역예배에 꼭 참석했습니다. 왜냐구요? 먹을 것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배가 아주 고팠던 시절이지만, 집에 손님이 오면 항상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나눔의 정성은 한곁같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봄’엔 담임목사님께서 전 교인 집을 심방하십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였지만, 어디서 구해오든 목사님 대접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배고픔을 많이 겪은 탓에, 배고픔을 잊기 위해 ‘나도 목사가 되어야지’ 하고 무심코 서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드린 언약을 지키지 못한 채, 저는 다른 길로 가 버렸지요.

그 시절에는 사랑이 넘쳐 흘렀습니다. 불신자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성도들을 좋아하고, 교회 다니는 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함께 나누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끼니를 거르는 분들을 몰래 조사해, 몰래 대문 앞에 먹을 것을 갖다놓기도 하였습니다. 행여나 그분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장사를 하다 화재 피해를 당하면, 목사님과 함께 교인 전체가 뜻을 모아 돕기도 하고, 위로하며 사랑했던 모습들을 추억합니다.

타 교단이나 옆 교회, 멀리 있는 교회에서라도 부흥사경회를 하면, 목사님께서는 ‘많이들 참석하여 은혜 충만히 받으라’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당시엔 타 교단이나 이웃교회 성도들도 서로 인사를 나누거나 안부도 물으며 함께 예배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웃 교회는 ‘타 종교’가 되어버렸고, 성도들끼리 아는 척도 않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마음 속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나 설교, 강의를 할 때는 “사랑해야 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실제 현장에서는 말과 행동들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면, 왠지 서글퍼집니다.

특히 안수집사들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틈도 없이, 장로가 될 생각만 합니다. 내가 장로 될 그릇인지 한 번쯤 돌아볼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오래 되었으니, 내가 성도들을 많이 아니까, 인기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를 밀어줄 든든하고 힘 있는 장로님이 계시니까 하며 교회 지도자가 될 꿈만 꾸고 있습니다.

자신이 장로로서 정말 합당한 인물인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를 위해 순교까지 할 수 있는지, 교회 발전을 위해 나를 내려놓고 오직 몸 된 제단을 위해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명철한 사고와 리더십을 지니고 있는지, 성경 지식은 해박한지, 모든 이들과 소통을 위한 마음가짐이 넉넉한지, 불쌍한 이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과 함께 그들을 품고 배려할 수 있는지…. 장로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인정받고 주님과 성도, 이웃의 불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한 직분이거늘, 장로가 되면 교회 안에서 서열과 권력으로 좌지우지 행사하려 하는 모습은 실망, 또 실망 자체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권력이 아닙니다.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신앙에 상처를 입었던 분들을 점검하고 상담하여, 그들을 품어주며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 교인들보다 먼저 교회에 출석하여 교회 구석구석을 살피며, 성도에게 위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제거하고,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에게 장애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사전에 제거하며, 혹 신앙에 상처를 받은 분들이나 여러 법률적 문제가 생긴 분들 등 다양한 목소리를 청취하고 해결하려는, ‘실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빈 수레일 뿐입니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모범적으로 담당하며 전할 의무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만 좋아할 뿐, 그리고 높은 곳에서 아래로 지시만 할 뿐, 자신이 ‘종’인 줄 모르고 있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더 답답한 일은 자신이 하는 잘못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를 저질러도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늘 그렇게 삶을 살았기 때문에, 변화 없는, 즉 ‘주님이 부재중인 상태’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재림을 위한 준비 단계로 변하지 않으면, 주님의 재림 때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흉악한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믿음의 선배들의 뜨거움 넘치던 열정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화목하며, 온정을 나누면서 신앙생활을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 불신과 미움이 가득합니다. 사명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모이는 회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업 이익의 수단으로 교회를 이용하거나, 사회 고위층과 자신의 직속상관이 교회에 출석하므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무조건 교회만 나오라고 하십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금요철야, 주일 낮·밤 예배, 그리고 월삭 예배 참석을 강권합니다. 예배의 참된 본질을 가르치며, 어떻게 하면 진실된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성도를 깨워야 하는데, 무조건 교회만 나오라고 강권합니다. 예배에는 철저히 참석하지만 죄는 더 많이 짓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제대로 말씀을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CTS기독교TV를 비롯해 많은 기독교 방송과 신문들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한 매스컴인지, 주님의 복음을 위한 언론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물질로 인해, 주님이 부재중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엉터리 설교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금품만 주면 설교를 하게 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정말 깊이 있는 주의 종들을 모셔서, 주님의 원하시는 설교를 방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나 일반 불신자들도 말씀으로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설교를 기대합니다.

기독 사업체들도 참신한 인재를 양성하여 복음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면 신원조회도 없이, 과거 행적도 찾아보지 않고, ‘장로니까, 안수집사니까, 권사니까’ 높은 직분을 맡기는 것도 ‘주님이 부재중인 현상’입니다. 일을 맡길 때는 그 직분에 합당한지, 창의성과 열정이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대신, 오직 돈 많은 분들로 구성하고 있으니, 현실과 미래를 향한 복음 사역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주님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교만과 탐욕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재중인 곳에서는 부흥을 기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변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잘못된 유대인들의 전례와 관습과 악습들을 철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뜻을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데, 왜 주님의 뜻에 불순종으로 나아가는지요?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참된 주님의 사랑을 마음밭에 심어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고, 교만과 아집을 버리며, 주님을 향한 믿음의 열정과 소망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여, “깨어나십시오”. 1분 앞을 예상 못하는 세상을, 본인은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수수방관과 무사안일로 일관하는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주님의 넓고 깊고 높은 사랑의 현장으로 하루속히 다가오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을 ‘부재중’으로 만들지 말고 늘 내 안에 머무르게 하며, 이웃들에게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입김을 불어 마음 속 깊이 전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