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미리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다시 나갔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나 자신이 이토록 작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천장이 높아서만은 아닐 테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화요일, 미사 시작 20분 전 서울 명동성당. 군데군데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스피커에선 미리 녹음된 듯한 수녀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 그러나 노래 같지는 않은, 성경을 낭독하는 소리. 미사를 드리는 내내 성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너무도 능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따라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혹 천사의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모든 것들이 미리 짜여진 순서대로 흘러갔다. 어느 것 하나 즉흥적인 것이 없었다. 웃는 얼굴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웃음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건 기대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사람,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되뇌는 사람……. 그나마 익숙했던 건 성호를 긋는 신부의 손동작 뿐이었다. 유일하게 따라해본 것이기도 하다. 그저 손으로 십자가를 긋는 것 뿐이건만,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인다.

신부가 단상에 올랐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는다. 지난 성탄절, 혹 신부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는지 묻는다. 신부는 청중들과 눈을 맞추며 이날 유일하게 ‘예고되지 않은’ 멘트를 날렸다. 비록 짧았지만, 신과의 거룩한 교감만 있던 이곳에서 사람과의 교감이 처음으로 이뤄진 순간이기도 했다. 어려운 이웃들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또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닮아 더욱 헌신하며 살아가자는 신부. 메시지는 5분이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이런 아쉬움은 아마 나 뿐이겠지. 분위기는 다시 엄숙해졌다.

성경을 교독하고, 기도문을 주고 받고, 포도주인지 물인지, 아니면 그무엇도 아닌 것인지 신부는 연신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그렇게 순서는 흐르고 미사는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줄을 선다. 앞에 선 신부가 작은 빵을 각각에게 나눠줬다. 성만찬과 비슷해 보인다. 나도 줄에 끼었다. 순서가 되자 앞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두 개의 성가를 연이어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낭독하며 미사는 끝났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엔 사랑을 심게 하고 다툼이 있는 곳엔 용서를 심게 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기도가 가슴에 와 박힌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나……, 여기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이 기도문의 의미……, 알고 있을까. 거룩한 종소리가 성당 가득 퍼진다.

▲하늘의 위엄을 드러내는 듯한 높은 천장, 숨죽인 불빛……. 분위기는 엄숙했다. 교회에서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경험이었다. ⓒ김진영 기자

그들은 ‘성스러움’을 좇았다

최근 개신교 인구의 수는 준 반면, 가톨릭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995년 876만명이던 개신교 신자는 10년 뒤인 2005년에는 861만6천명으로 줄었지만, 1995년 295만1천명이던 가톨릭 신자수는 2005년 514만6천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총인구대비 비율 역시 개신교는 1995년 19.7%에서 2005년 18.3%로 줄었고 가톨릭은 6.6%에서 10.9%로 늘었다. 아직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았으나 최근 진행된 ‘2010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예상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여러 요인 중 개신교와 가톨릭이 가진 종교적 특징 자체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눈길을 끈다. 가톨릭의 미사와 개신교의 예배에서 보듯, 두 종교는 각각의 고유한 신앙적 표현 형식이 있다. 가톨릭이 종교적 형식의 강조를 통한 거룩함의 체험을 중시한다면 상대적으로 개신교는 신자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보다 자유로운 신앙의 모습을 추구한다.

문제는 개신교의 이러한 자유함이 최근 신뢰도 하락과 더불어 ‘성스럽지 않은 종교’로 여겨진다는 데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실천신대 석좌교수인 박영신 교수는 “개신교는 외형적으로는 성스러움을 과시하고 있으나 실상은 성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다”며 “스스로 바깥 집단과 구분하지도 않고 구별할 수도 없게 된 교회, 그곳에는 성스러움이 없다. 세상과 짝하고 있는 한 거기에는 성스러움이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목회사회학연구소(소장 조성돈 교수)가 최근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 15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가톨릭의 ‘ 성스러운 이미지’가 개종의 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가톨릭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큰 요인은 신뢰성”이라며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쉼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가톨릭의 전통적 전례는 현대인들에게 멈춰설 수 있는 존재의 공간으로 비쳤다”고 말했다.

또 그는 “어느 개종자는 ‘개신교는 표현의 종교, 가톨릭은 묵상의 종교’라고 말했다”며 “현대인들은 내면의 쉼을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장소를 찾고 있는데 가톨릭은 그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사회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기자가 명동성당에서 만난 개종자들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학창시절 개신교를 믿다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한 신자는 “교세확장에 혈안이 된 개신교의 모습이 싫었다”며 “무엇보다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타락한 모습에 실망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한 신자도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세상에서의 직업과 생활환경이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암묵적 차별의 기준으로 작용했다”며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고 오히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의 관계성에만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신교가 세속화에서 벗어나고 그 고유의 특징을 살린다면 오히려 가톨릭에 비해 그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가톨릭의 성스럽고 장엄한 예전이 현대인들을 성당으로 데려올 순 있으나 신자 개개인의 ‘성스러움’은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가톨릭으로 간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성스럽게 되려하기 보다 성당과 성직자의 성스러움에 만족한 채 그것을 소비하려 한다”며 “개신교가 성스러움을 회복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지 개선이 아닌 신자 개개인의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방향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한 신자는 “(개신교가) 개인의 신앙적 표현이 자유롭고 교인들 사이의 교제가 많은 점이 좋았다”며 “특히 예배에서 말씀 선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성경을 보다 깊이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