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 설립, 현대적 미술 교육
작가 창의력·역량 발휘 풍토 조성
해외 작품전, 국제 진출 등 교류도
북녘 미술가들 월남해 활력 생겨

천병근 귀향
▲천병근, 귀향, Oil on Canvas, 45x91cm, 195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6.25 전쟁 기간 낙동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피난 행렬을 주제로 한 작품.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전에 출품됐다. ⓒ서성록 교수 제공

김덕영 감독의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정치에 대해 비난이 횡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계에도 온갖 비난이 횡행한다. 어떤 전공서적이나 논문을 살펴보아도 그의 치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커녕, 비난과 왜곡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비난들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류의 부정적 평가와 민중사관에 입각한 오염된 진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제1공화국은 우리나라가 건국된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며, 이전과 구별되는 예술과 관련된 몇 가지 지점이 눈에 띈다. 우리는 그 문제를 교육적 측면, 창작 활동, 해외교류, 월남 인사들의 활약 등에서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교육적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미술대학의 출현이 목격된다. 이승만은 하와이 체류 시절 ‘한인중앙학원’ 교장을 맡는 등 교육 사업에 애정을 쏟았는가 하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교육진흥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이승만 정권 말에는 대학 진학률이 당시 제2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보다 높은 수준을 달성하기도 했다. 물론 서울대와 이화여대처럼 해방 직후 설립된 대학도 있었지만, 제1공화국 이후 전국에 인재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특히 미술의 경우 과거에는 동양화가들에 의해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 존재했지만, 실기와 이론 등 체계적 교과 과정을 갖춤으로써 화학도(畫學徒)들은 현대적 교육을 받게 되었다. 전문교육기관의 설립으로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갈 유능한 예술가들이 배출됐다.

둘째, 작가의 창작활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각자 창의력과 역량을 발휘하는 풍토가 배양됐다. 흔히 이것은 북한 공산주의 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미술가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며 ‘김일성 우상화의 노예’로 전락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남한 사회와 같은 표현 자유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런 작가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승만은 철저한 그리스도인임과 동시에 ‘휘호’와 ‘한시’에 능한 품격 있는 지식인이었다)’를 신설하였다. 이를 통해 걸출한 미술인이 배출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주도 세력은 학연과 정실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보다는 작가가 마음껏 창작활동을 펼 수 있는 구조적 배경을 만들어준 것이 더 큰 공로라고 판단된다. 집권 시기 동안 ‘신사실파’를 비롯하여 ‘기조전’, ‘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가협회’, ‘현대미술가협회’ ‘현대미술초대전’ 등 현대미술의 초석을 놓은 단체 내지 전람회가 등장하였다.

셋째는 해외 교류를 들 수 있다. 1950년대 예술계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서방 국가들와의 교류가 그것인데, 그 여파로 국내에서 외국 전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벨기에 현대미술전>(1952)과 <동킨만(董景文) 수채화전>(1954), <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1957), <국제판화전>(1957),<현대서독판화전>(1958),<현대미국판화전>(1959)이 개최되었다.

소수 개인전부터 여러 명이 참여한 단체전까지 형식도 다양했는데, 이 같은 전시는 서구의 동시대 미술을 경험케 해주었다.

이 같은 전시에 대해 정규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미술문화는 자유 우방의 미술문화와 더불어 세계 미술로서의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전쟁의 참화는 우리에게는 끔찍한 재앙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이를 계기로 다른 나라와 교류를 트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발표 무대를 본격적으로 세계 각국으로 넓히는 일은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남관, 이응노, 김환기, 이성자, 한묵, 권옥연, 변종하, 함대정, 김훈, 박서보, 이수재 등은 프랑스 파리나 미국 등 국제무대로 진출했다.

1950년대 중반 서울에 와 있던 ‘서울 아트소사어티’ 멤버 중에는 한국 미술을 널리 알린 사람들도 있었다. 실리아 짐머만(Celia Zimmerman)은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열린 <동서미술전>에 박수근, 성재휴, 김영기 등의 작품을 소개하였는가 하면, 조지아 대학 엘렌 D. 프세티(Ellen Psaty)교수는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개최한 <한국현대미술전>(1958)에 우리나라 작가들을 소개한 바 있다.

또한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내현대판화 리토그라피전>에는 이항성, 유강열, 정규 등이 참여하였다. <한국국보전>(1957)은 보스톤,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지 미술관을 순회하였는데, 현지 매스컴에서 ‘양식과 주제의 다양성 측면에서 한국 회화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 국민에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안겨준 6.25 전쟁은 북녘 미술가들이 월남한 시기이기도 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당시 중공군의 총공세에 밀려 후방으로 물러난 것이 1.4 후퇴인데, 그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미술가들이 남한행을 선택했다.

좌파 이론가들이 말하듯 그들은 개인 영달을 위해, 혹은 범죄를 저질러 남한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없는 것, 즉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예술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았고 자유시민이 되었다.

부모와 헤어지거나 처, 자녀, 형제를 남겨두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남한에 정착한 미술인들이 우리나라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그중에는 박수근, 윤중식, 김학수, 김영재, 황용엽, 황유엽, 홍종명, 정규, 신영헌 등 크리스천 작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해 실향민으로서 시름을 달래는 동시에, 모든 것의 주권이 그리스도에 있음을 알렸다.

김일성과 공산주의 체제 선전을 위해 붓을 든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고, 신앙적 양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 월북한 작가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김일성 초상화나 선전화를 제작하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막상 월북해 보니 결코 그들이 꿈꾸던 조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정책은 좌익의 준동, 나라 세우기, 6.25 전쟁, 그리고 전후에는 국가 재건, 가난과 씨름해야 했으며 제대로 된 문화정책을 펼 만한 여건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문화정책이 포기되거나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문화인 등록’처럼 행정편의적 정책도 눈에 띄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라 세우기의 큰 밑그림 안에 예술 역시 전문가의 양성, 자유로운 창작 풍토 진작, 해외 진출과 교류와 같은 일신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방면에서 혁명 수준의 개혁이 숨가쁘게 진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갑신정변, 갑오경장으로 이어진 1세대의 문명개화 정신을 계승한 지도자 이승만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왜곡된 민중사관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의 기틀 안에서 성취된 제1공화국의 문화를 새롭게 바라볼 시점이 되었다. 자갈밭을 옥답으로 바꾼 거인을 못 만난다면, 오늘의 번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지도, 헤아리지도 못할 테니까.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