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글자 수에 따라 배치돼
로마서가 가장 길어서 가장 앞에
한 장뿐인 빌레몬서가 가장 뒤에

사도 바울
▲영화 <바울> 속 사도 바울의 서신 기록 모습.

3) 신약의 특징적인 부분들

 ① 바울서신의 특징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권으로 이루어진 바울서신의 배열은 매우 특징적입니다. 즉 13권의 바울서신은 중요도나 혹은 쓰여진 순서가 아니라, 편지의 글자 수(즉 길이)에 따라 배치된 것입니다. 모두 16장으로 이루어진 로마서가 가장 앞에 배치되었고, 똑같이 16장으로 되어 있지만 길이는 조금 짧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 한 장으로 구성된 빌레몬서가 바울서신의 가장 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이에 따라 편지가 배치된 이유는 처음 바울서신들이 모아질 때 각 편지들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서신을 제대로 읽으려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편지가 앞에 나왔다고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록된 순서대로 배열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서신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배열된 순서가 아니라 기록된 순서대로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편지가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개신교인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편지입니다. 오직 이 두 곳에만 개신교 교리의 핵심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즉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나와있기 때문입니다(롬 1:17, 4:13; 갈 2:20).

이렇게 중요한 편지이지만 편지를 쓰는 바울의 마음 상태는 매우 달랐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쓸 때 아직 젊은 나이였던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을 의심하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느꼈던 배신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사도로서 자신의 입지가 완전히 바뀌었을 때입니다. 제 1·2·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물론 바울 자신도 놀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 결과 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고, 초창기 자신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보였던 날카롭던 반응도 차분한 대응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새로운 교회 개척지를 찾아 스페인으로 갈 계획을 세우면서 로마를 들르려 하는데, 아직 로마 교인들은 소문만 들었지 바울이 어떠한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로 차근차근 자세히 기술합니다.

이처럼 비록 모두 바울이 쓴 편지였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썼는가에 따라 편지의 분위기나 배경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울서신을 읽기 전 이런 시간적 또 공간적 배경을 알게 된다면 훨씬 더 편지의 내용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바울서신에 명확하게 기록돼 있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이 편지를 잘못 이해할 수 있기 쉬운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 쓰여진 시간과 장소가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간과 장소를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 연대기

편지 양에 따라 배열된 바울서신을 기록된 순서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 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 디모데 전서- 디도서- 디모데 후서 등의 순서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여정과 맞추어 읽게 되면, 각 편지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것입니다.

일반서신도 분량 순서대로 배열
연대나 장소 거의 알려지지 않아
시공간 배경 모른 채 읽어나가야
히브리서는 저자도 몰라 더 난제
배경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장점

② 일반서신

바울서신과 마찬가지로 일반서신도 기록된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편지 분량에 따라 배열되었습니다. 13장이나 되는 가장 두꺼운 히브리서가 가장 앞에 위치하고, 5장으로 된 야고보서가 뒤를 잇습니다. 베드로전서나 요한1서도 각 5장씩이지만, 분량이 적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뒤에 위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장뿐인 유다서가 일반서신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반서신이 바울서신과 다른 것은 각 서신의 연대나 쓰여진 장소를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에, 바울서신처럼 편지가 쓰여진 시간이나 공간의 배경을 알지 못하고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일반서신의 해석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히브리서는 저자까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해석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 관점에서 해석한 유일한 성경이자, 굉장히 수준 높은 헬라어 문학 기법을 가지고 쓴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책이지만, 아쉽게도 이 책의 배경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일반서신은 기록된 것 이외에 각 저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제외하면 편지가 쓰여진 구체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위로가 된다면, 일반서신은 요한1-2-3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관련된 저작물들이 따로 없기 때문에 언제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바울서신은 바울의 연대기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있어야 올바른 접근이 가능하지만, 시간적·공간적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을 얻을 수 없는 일반서신은 비교적 쉽게 제약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주 예수의 복음
▲사복음서의 저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

공관복음, 배열 순서대로 기록?
자유주의, ‘마가복음부터’ 주장
이출전설, 약점 많아 영향 상실
20세기 마가복음에만 초점 맞춰
‘교회 복음’ 마태복음 관심 줄어

③ 공관복음

공관복음은 초대교회 때부터 배열된 순서대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출전설(Two Source Theory)이 발호하면서, 기독교의 이런 전승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즉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참고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믿어져 온 성경의 신뢰는 많이 흔들리게 되었고, 20세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갖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엄청난 후퇴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출전설은 하나의 학설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은 많은 약점들이 노출됨으로 인하여 그 영향력이 점점 상실되고 있습니다.

이출전설이 가져온 폐해는 기독교계에서 마태복음의 추락과 마가복음의 상승을 가져왔습니다. 마태복음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복음(마 16:18, 18:17)”이라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쳐왔는데, 갑자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보다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 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이 마가복음에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마가복음이라며, 나머지 복음서들은 아예 무시하고 마가복음에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20세기 쓰여진 각 복음서에 대한 주석 책들의 권수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가장 사랑받아온 책
구약과의 연관성도 가장 뛰어나
구속사 주인공=예수님 잘 묘사
신약의 얼굴, 이출전설로 피해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책으로 초대교회 시절부터 가장 사랑을 받아온 복음서입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인 모든 성경이 다 중요하지만, 교회에 끼친 영향은 약간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많이 담긴 책입니다. 마태복음 5-7장(산상강화), 10장(제자파송 강화), 13장(천국비유 강화), 18장(교회 강화), 24-25장(종말 강화)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만 하는 특별한 가르침이 포함돼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구약과의 연관성에서도 신약성경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지만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편집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는 바로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타낙에 나오는 선지서를 확대 재편성하였고 신약과의 연관성을 위하여 구약의 맨 끝 즉 복음서 바로 앞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는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것은 마태복음을 따라갈 복음서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이 자그마치 20여회 이상 나옵니다. 비슷한 표현까지 합치면 모두 40회가 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대로 오신 분임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가 잘 드러난 표현으로, 마태복음 특징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모습들 때문에 신약의 얼굴로 기독교인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아온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마태복음이 맞닥뜨린 도전은 바로 기독교에 너무나 큰 피해를 입혔던 이출전설이었습니다.

이 가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삼중 전승(Triple Tradition)’과 ‘이중 전승(Double Tradition)’ 때문이었습니다. 삼중 전승은 모든 공관복음서에서 관찰되는 내용이고, 이중 전승은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관찰되는 내용입니다.

삼중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순서가 나머지 공관복음서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중 전승은 마가가 모르는 ‘Q(uelle; 문서)’라는 가설적 문서를 마태와 누가가 참고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출전설에 따르면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출전설
▲이출전설을 설명하는 도표.

이출전설, 설득력만큼 문제 많아
Q 문서 존재 여부 증명하지 못해
오히려 마태와 누가에 같은 표현
공관복음, 비슷한 이야기들이나
자세히 보면 강조점 등 각각 달라

그러나 이출전설은 그 설득력만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Q라는 가설적 문서의 존재 여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모아 놓았다는 <도마복음>이 Q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2세기 이후 작성된 것으로 보아 1세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Q 문서의 존재를 명확하게 입증해 주지는 못합니다.

또 삼중 전승에 있어서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마가복음을 참고로 하였다면, 마태와 누가의 표현이 마가와 달라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언급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오히려 마태와 누가는 표현이 같고 마가와는 다른 것을 볼 때 과연 이출전설이 올바른 가설인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Minor Agreement; 마 3:11-12/ 막 1:7-8/ 눅 3:16-17).

이처럼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기독교계를 휩쓸었던 이출전설은 그 이론의 한계를 드러냈고, 지금은 문서의 작성 순서보다는 각 복음서의 특징적 모습에 연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즉 공관복음은 얼핏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비교해 보면 문학적 구성이나 주제 또 강조점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출전설을 근거로 복음서를 해석하고 또 그 해석된 것을 근거로 이출전설을 보강하는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 논법’에서 벗어나, 각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그리스도 접근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 방법이 요즘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이라는 종류의 책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런 류의 연구방법론이 최근 많은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서신, 가장 늦게 성경 편입
계시록, 정경 자격 수많은 논란
역사 속 이단 시비, 거의 계시록
정확히 푼다는 사람은 경계해야

④ 요한서신

요한 문서(Johannine Literature, 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들은 가장 늦게 성경에 편입되었는데, 특히 요한계시록은 정경으로서의 자격에 대하여 가장 논란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종교개혁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는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모든 성경의 주석책을 쓴 칼빈도 요한계시록만큼은 “잘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주석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계시록이 신약 27권 중 하나로 정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경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늘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이단 시비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서 나왔습니다. 스스로 감추어진 비밀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정확히 푼다 하여, 자칭 재림 예수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나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밧모섬 사도 요한 복음서 계시록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는 사도 요한을 그린 그림.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계시록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을 당대의 두드러진 사건들과 연결시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이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그 비밀을 밝히고 있는 중이라고 현혹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비밀을 밝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종이거나 혹은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약한 믿음 가진 기독교인들에
좋은 경계 되는 요한계시록 말씀
사이비처럼 미리 아는 것 아니라
늘 준비되어서 맞이할 수 있어야

요한계시록이 습관적 신앙에 빠져 나태하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 하여 특정 날짜와 장소를 지정해 계시록에 기록된 사건이 앞으로 곧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가짜 재림 예수들이 보여온 패턴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풀이할 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늘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끝날에 대한 구체적 예언이라기보다, 전쟁이나 기근 등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과 공포를 주는 것들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형상화해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요한계시록에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는 비밀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앞으로 재림의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 승천 후 2,000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셨는데, 앞으로도 올 것 같지 않다”는 나약한 믿음을 가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경계가 될 것입니다. 재림의 날은 아버지밖에 모른다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24:36).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바로 우리의 영적 눈을 밝혀줄 “등잔 기름(성령)의 준비”입니다(마 25:1-13). 가짜 재림 예수들이 주장하듯 재림의 날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재림 예수께서 오늘 밤이나 내일 오시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세입니다.

무두질 성경 가죽
▲성경 기록을 위하여 가죽을 무두질하는 모습.
성경 내용뿐 아니라 구조에서도
구속사의 드라마 읽어낼 수 있어
차근차근 성령님과 대화하면서
읽게 되면 깨닫는 바 크게 될 것

4. 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이 왜 지금의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성경을 읽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구속사의 완성으로 보고, 또 이런 관점에 따라 성경 구조도 바꾼 것입니다.

즉 역사적 시간 순서보다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드라마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 시간 순서에 따르지 않고 다시 배치함으로써 구약의 목적은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책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에 따라 신약 성경도 작성된 시간이 아니라 구약을 구성한 기본 원칙에 충실하게 배치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신약에서 가장 먼저 주어지고 난 다음, 그 복음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로마까지 전파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서신들은 각 교회에서 또 각 가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복음이 실천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신앙의 끈을 느슨하게 하지 않도록 다잡고 있는 것입니다.

토라 성경 구약 타낙 유대 말씀 별
▲원어로 기록된 성경 모습. ⓒ픽사베이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내용에서뿐 아니라, 성경의 구조에서도 구속사의 드라마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면 그냥 무작정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 성경 읽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숲을 보고 난 다음 나무를 보게 되면 길을 잘못 들 염려가 확 줄어들 뿐 아니라 체계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급히 읽을 것이 아니라 주변을 차근차근 살펴 가면서 마치 성령님과 대화하는 기분으로 읽게 되면 깨닫는 바가 클 것입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큰 그림에서 드라마를 보며 읽는 방법은 성경 각 권을 읽을 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은 모두 개성이 강한 책들로, 준비없이 읽게 되면 그만큼 잃는 것도 많게 됩니다.

각 성경은 나름대로의 주제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무시하거나 혹 잘못 파악하게 되면 그 책의 이해는 엉터리이거나 부족한 것이 될 것입니다. 대신 주제와 구조를 잘 파악하면 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의 문맥이 정확해지면서 더불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나름대로 성경을 보는 관이 생길 것입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