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예루살렘,
▲예루살렘 전경. ⓒPixabay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 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8:7)”.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33-44)”.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누가복음 19:40-41)”.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관한 기사는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무조건적 용서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시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따라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질문함은 예수에 대한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께서 어떻게 나오시는지 그 말과 행동을 본 뒤 고소 절차를 밟기 위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다 쓰십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시험해 법정에 세우려 했던 사람들은 그 지혜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예수님과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양심이라는 가책을 느껴 조금이나마 다행이지만, 지금 시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양심을 내팽개치면서 ‘국민을 위하겠다’는 모순 넘치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이제 귀를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은 놀라운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이용해 모세의 율법 논리로 예수님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답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법 위반자로 고소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산헤드린을 통해 사형을 구형할 수는 있었으나, 그 집행은 로마 총독의 관할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대답은 사랑을 역설하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그들은 산헤드린을 통해 예수님을 유죄로 선언했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었기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로 치라’고 명쾌하게 대답하시며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아 죽을 사람과 거기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 모두를 품어 주십니다. 그것은 오롯이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곧 들이닥칠 수난과 죽음의 잔을 한 손에 쥔 채, 수많은 인내의 십자가를 엮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갑옷을 두르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모습으로 저마다 상상을 총동원하여 종려나무 가지와 겉옷을 길 위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열정적으로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당시는 로마로부터 압제를 당하던 때라, 혹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왕으로 오시는 게 아닌가, 만약 이스라엘 왕이 된다면 나에게도 한 자리 정도는 차지하는 영광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대에 부푼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속에 수난과 영광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군중들은 금송아지에 마음을 빼앗기고, 스스로의 완고함과 편견의 잣대를 갖고 마음대로 해석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맙니다.

하지만 이 나라 왕도 아닌데 그 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도 비칩니다.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눈치를 보며 뒤적거리다, 누군가는 군중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하늘을 향해 옷을 찢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고 우십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메시아를 맞이하며 예수님을 찬양했지만, 곧 이어 예수님을 모함해 고난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하나님의 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사꾼과 환전꾼들을 다 내어 쫓으시며,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렇게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외면한 채, 부와 권력을 좇아 거듭되는 전쟁과 증오로 오늘도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담대히 예루살렘의 거짓된 신앙을 고발하시며 우리의 교만과 아집, 고집을 무너뜨리려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낡고 부패한, 평화가 없는 예루살렘을 넘어서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고 반대하고 서 있는,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고 서 있는, 교만과 아집, 욕심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예루살렘을 넘어가도록 합시다.

편견과 비판, 증오와 질투, 무관심과 어리석음의 예루살렘을 넘어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예수님께서 지라고 하신 겸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온전히 참여하므로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동참합시다.

간음한 여인을 구원한 예수님처럼,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 나사로의 무덤에서 슬피 우셨던 그 주님을, 깊은 회개를 통하여 우리 모두 동참하는 참 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올해가 벌써 반이 지나가는 이때 돌아봅니다. 크리스천 여러분들의 올해 신앙 여정은 어떠하셨는지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겠다고 해마다 무던히도 다짐했던, 수많은 극기와 희생, 보속들을 현실의 장벽과 나약함 앞에 하나둘 포기하며, 실망 가운데 나 자신을 탓하는 원망이 마음에 자리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극기와 희생은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은총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는 삶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담아,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거슬러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그 분을 따랐던 이들이 살아낸 살아있는 제물로서의 삶을 소망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짓이 없고, 정직한 문화 속에 정의와 공정, 평화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참된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