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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립보서 4장 10-13절


아 그렇습니까?

허봉기 목사님의 수상집 <사도가 코고는 소리>에 보면 ‘아, 그렇습니까’라는 글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고결한 삶을 산다고 칭찬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꾸인’이었다. 그 동네의 한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러왔다. 아버지는 딸에게 누구의 아이냐고 다그쳤다.

딸은 생선가게 총각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무심코 ‘하꾸인’이라고 대답을 했다. 아버지는 낳은 아기를 ‘하꾸인’에게 건네면서 어찌 이렇게 분별없는 짓을 하였느냐고 나무랐다.

잠자코 듣던 ‘하꾸인’은 아이를 받으면서 “아 그렇습니까?” 그저 한 마디뿐이었다. 그 일로 ‘하꾸인’은 그의 평판은 잃었지만, 그의 마음을 더럽히지는 못하였다.

후에 딸은 아버지에게 사실은 생선집 총각의 아이라고 밝히게 되었다. 아버지는 ‘하꾸인’에게 찾아가 백배사죄를 하고 그 아이를 돌려받았다. 이때에도 ‘하꾸인’이 한 말은 “아 그렇습니까?” 뿐이었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데 관심이 있다. 명확한 사실보다 사람들의 부정확한 견해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사는 가이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다.

당신이 바르다면 당신을 둘러싼 견해에 시달리지 말고 가던 길을 당당히 걸어가라. 그저 “아, 그렇습니까?”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 당당히 가던 길을 걸어가는 것, 그저 “아, 그렇습니까?”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이것이 본질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교회로서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목사인 저 자신을 바라보고 제 삶을 바라보면서도, 때로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삶의 본질 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을 쫓아가게끔 만듭니다. 곧 본질보다 비본질이 더 크게 보이게 합니다.

만족이 가장 큰 재산이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이 외적인 것만을 생각합니다. 가지고 있는 돈, 집, 땅 등 보이는 것만을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비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정말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재산은 눈에 보이는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재산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재산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 가운데 공통적으로 ‘만족’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유해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한 것이고, 가난해도 만족하면 부유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잠언 15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처럼 만족스러운 삶은 물질적인 재산이 아니라 만족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족이 최고임을 깨닫게 된 목동

한 천사가 인간 세상에 와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깨어 보니 누군가 그의 날개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는 보통 사람보다 능력이 없었습니다. 춥고 배고파진 천사는 어느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저는 천사인데요.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을 연 집주인은 비에 젖어 옷이 다 쭈끌쭈글해진 천사를 보고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선물을 가져왔나요?”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려 천국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선물을 가져오지 못했답니다.”

그러자 주인은 성난 얼굴로 말했습니다. “날개도 없고 선물도 없는데, 천사는 무슨 천사요?” 그는 쾅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천사는 처량하게 두 번째, 세 번째의 집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기운이 빠진 천사는 길가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양을 치는 남자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천사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허기를 채우고 따뜻한 옷을 얻어 입은 천사는 남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양을 치는 남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천사가 아니라 해도, 난 당신에게 밥을 줬을 겁니다. 할 일이 필요하면 나와 양을 쳐도 됩니다.”

당장 천국으로 돌아갈 뾰족한 수가 없던 천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사는 매일 양을 돌보며 남은 양털을 모아 얼마 뒤 양털 날개 한 쌍을 만들었습니다. 천사는 그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남자는 깜짝 놀라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았습니다. 며칠 뒤 천사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양을 치는 남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양을 백 마리만 더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흔쾌히 양 100마리를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치게 많은 양 때문에 피곤해졌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양 대신 큰 집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천사는 역시 기꺼이 큰 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큰 집은 여기저기 먼지가 쌓이는 통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다시 집을 말로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말을 타도 달리 갈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말을 천사에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남자는 천사에게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깜짝 놀란 천사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바라는 것이 많게 마련인데, 갖고 싶은 게 없다니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싶은 것들을 가진 다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게 그런 것들은 필요 없어요. 오히려 성가실 뿐이죠.”

천사는 미소를 띠며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선물인 성격을 선물하면 어떨까요? 어떤 성격을 원하나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전 이미 만족할 줄 아는 성격인 걸요.”

욕심 때문에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가져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하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이룰 때, 어느 시간까지는 만족감도 기쁨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면 만족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그 속에 또 욕심이 들어옵니다. 욕심이 들어오는 순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한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 때문에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갈망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내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으며, 욕심을 내어 얻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족한 것을 만족으로 알면 늘 만족스럽다.”

성경은 아예 욕심이 죄의 출발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말씀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이 주어져도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만족을 가장 큰 재산으로 삼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도 역시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족이 능력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 물질 후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얼마 동안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물질 후원을 받지 못하니 바울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빌립보 교회가 자신을 후원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0절에서 ‘이제 다시 싹이 났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항상 바울 사도를 돕고자 하는 마음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절한 기회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외부 환경 때문에 자신을 후원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선한 마음을 알아주면서 그들을 기쁨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시 후원해준 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은 내가 궁핍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미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때도 있었고 풍부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배부를 때도 있었고 배고픈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들을 다 경험하면서 바울은 그 자체로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말씀은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거의 외우고 있는 말씀입니다. 굉장히 힘이 되는 말씀이라 ‘빌사일삼’이라고 해서 저도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문맥의 의미를 모른 채 무조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맥상으로 보면 바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부하든 가난하든 풍부하든 궁핍하던 어떤 환경가운데는 만족할 수 있다.” 곧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상황 가운데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족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자족’에 해당되는 ‘아우타르케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여기에게만 사용이 되었습니다. 실제 이 단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윤리적인 용어였습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여겨, 그 가운데서 만족하기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모든 일에서 만족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자족 생활은 스토아 철학자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의 자족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십니까?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신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욕심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비교를 하되, 나보다 훨씬 잘 살고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렇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이상, 우리는 결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어떤 나은 자리나 환경에 처하든 나보다 항상 위에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과 남과 비교하는 것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에 만족하면서 안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미래를 꿈꾸라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임을 믿으라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째,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개입하셔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어진 환경이 내가 원하는 환경이든 원하지 않는 환경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환경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금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분들이야 만족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분들은 만족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환경이라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족을 넘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과정을 넘어 더 나은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지난 삶 가운데 이미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펼쳐 가실지 모릅니다.

저는 상주 시골 촌놈입니다. 시골 촌놈이 대구광역시에 와서 목회할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늘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처해 있는 환경 자체를 바라보니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늘 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하든 그 환경 가운데 삶의 태도를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인 줄 알고 그 환경 가운데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때, 더 나은 환경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지금 주어진 환경가운데 만족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때, 더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에 반대로 지금 주어진 환경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면, 이런 삶이 계속 이어지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태도, 곧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환경 가운데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을 인정하고 만족하는 삶의 태도로 바꾸어 보십시오. 만족을 넘어 감사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힘들겠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고백하며 살아보십시오. 분명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둘째,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만족은 진정한 만족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결국 불행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미국 보스턴에서 한 젊은 부부가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로 백일잔치 같은 것을 열었겠지요.

젊은 부부의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아, 애인들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을 했습니다. 젊은 부부를 비롯한 파티에 참석한 친구들은 다들 뒷방에 겉옷을 내던졌습니다. 음악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창 놀던 중 한 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파티의 주인공인 아기는 어디에 갔지?’ 그때부터 모두가 미친 듯이 아기를 찾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주인공 아기는 자신의 파티가 진행되는 내내 모두에게 잊힌 채, 뒷방 겉옷 더미 아래에서 버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놓쳐버리면, 우리의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이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나머지 것이 다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 영원

하나님만으로 우리가 충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한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원’이라는 선물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은 영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천국이라는 말로도 대체를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때 시드니 하버 브리지에 걸렸던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Eternity’라는 단어입니다. ‘영원’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곧 시드니 올림픽 주제가 ‘영원’이었습니다.

왠지 올림픽 주제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이 영원히 남을 기록을 세우라고 하는 취지에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호주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심지어 당시 단어의 필체까지도 살아 있는 호주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참전용사 아서 스테이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삶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 도박과 경범죄로 조금 남은 돈마저 다 날리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점점 술주정뱅이에서 노숙자로까지 전락했습니다. 그는 허전한 영혼을 달래려고 온갖 시도를 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1932년 11월 어느 주일 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이끌고 한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저녁 존 리들리 목사가 전한 설교의 주제는 ‘영원’이었습니다.

“형제여, 당신은 분명한 목적지로 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이 그 목적지를 갈망하도록 지으셨습니다.”

리들리 목사는 모든 인간의 정해진 종착역을 설명하면서, ‘영원’이란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날 영원이라는 단어가 스테이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고,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으며, 복음만이 이 필연적인 목적지를 위해 우리의 영혼을 준비시킬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구원의 메시지와 그의 영혼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동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일에 남은 생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단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35년 넘게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은 뒤 분필 하나를 들고 시드니 거리로 나가 ‘영원’이란 단어를 곳곳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매번 아름다운 필체로 이 단어를 수천 번도 더 썼습니다.

날이 밝으면 마을 사람들은 도처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카페 앞 인도에서도 도로 표지판 뒷면에서도, 건물의 머릿돌에서도 마을 도처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 색채가 나는 이 단어에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이상하게도 이 단어에 힘을 얻었습니다. 시드니 시민들은 1956년까지 아무도 이 단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은 이 단어를 쓴 주인공이 스테이스라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내세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지지하고 환영했습니다.

지금도 시드니 정부청사의 한 탑 꼭대기에는 50년 전에 그가 쓴 ‘영원’이란 단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스테이스는 1967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분필 자욱이 다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 새천년 첫 올림픽 주최국인 호주는 올림픽 주제를 ‘영원’으로 선택했습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천국으로 초대된 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재산은 보이는 재산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만족이 가장 큰 재산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감사인생(공저)’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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