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일입니다. 그리고 내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의미있는 때, 본지는 조직신학자인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의 <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를 매주 연재합니다. 본지 편집고문이기도 한 김 박사는 앞으로 이 지상 강좌를 통해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앙, 그리고 신학을 살피며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고찰할 예정입니다.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셋째, 유럽에서 사회적 관계가 변화되었고,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졌다. 유럽 사회의 구조는 피라미드 체제였고, 철저한 상하 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은 교황과 성직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체제를 거스르는 운동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특권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사회의 기본 구조는 농지를 기본으로 하는 체제였고, 가족들끼리 연계되어 있었다. 군주들과 귀족들은 농부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는 급작스런 변화가 없었다.

사회적 관계의 변화와 함께, 각자 자신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을 심각하게 제기했고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학적으로 선명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단지 고해성사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야만 한다거나, 미사의 참석을 통해서 각자 선행으로 공로를 세우라는 지침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갈등하게 되었고, 과연 로마 가톨릭이 제시한 것이 정당한가를 놓고서 대립적인 의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점차 미사의 참석 여부를 놓고서 각 개인들 사이에 전에 없던 긴장이 고조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단일 조직체에서 수장이라는 권위를 지켜나가려고 했다. 단일 군주제도가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듯이, 교황권의 영향력 행사를 강화하려 했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교황들, 식스투스 4세, 알렉산더 6세, 인노센트 8세 등은 각각 정치적으로는 화려하게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영적인 지도력에서는 실패했다. 누구도 이들 교황들을 신뢰하고 존경하지 않았다. 이들 교황들의 관심사항은 정치와 전쟁, 예술과 문학, 사냥과 호화스러운 생활과 건축 등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도적 의무감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5차 라테란 종교회의 (1512-1517)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진 종합적인 반성과 갱신의 기회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 회의를 통해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윤리를 갱신하기는 고사하고, 오직 교황에 대해서 철저한 압박을 강요하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는 교황이 왕에 대해서 저주하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하면서, 교회의 갱신을 요구했다. 불만족스러운 추기경들을 규합하여 1511년 9월 1일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다음 교황 레오 10세가 물려받은 회의에서는 결국 교황권이 지상의 모든 권세들보다 위에 있음을 주장하던 교서 (Unam sanctam, 1302)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자신이 경쟁자 우르비노 추기경과의 싸움에 빠져 있었다.

도시인들의 상호 관련성은 시의회와 군주들이 장악한 재물과 상업에 의존하였다. 이들은 상호 결혼관계로 연계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과 독점체제를 지탱했다. 도시인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종교개혁으로 진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넷째, 곳곳에는 성직자들이 넘쳐났는데 이들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서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성직자중심주의가 오래 지속되면서 함량미달의 성직자들이 양산되었기에 만들어진 부패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교회 내부에서 자체적인 갱신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해졌고, 더 이상은 방치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성직자들의 무관심, 부도덕, 불법행위가 극에 달하였다. 많은 교구에서 서로 격돌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16세기 초, 성직자들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늘어났다. 제일 큰 도시 독일 콜론에서는 인구 4만 명에 6천 여 명이 성직자들이었다. 상류귀족들을 상대하는 높은 성직자들은 귀족집안 출신들이었고, 하층 서민을 상대하는 교구 신부들은 하류 계층에서 나온 사람들이어서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하였다. 영국 성직자들 가운데 10%내지 20%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분들이었다. 독일에서는 교육받은 성직자들이 절반 가량 되었다. 일반 성도들도 거의 대부분 문맹자들이었기에 성직자들에게 높은 교육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중세 성직자들은 독신주의 서약을 하고서 성례를 집행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3분의 1가량은 내연의 처를 갖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성직자들이 아내를 얻는 것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황 피우스 2세는 당시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직자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렇지만 로마 교회는 그 방향으로 개선안을 채택하고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많은 주교들이 성직자들의 아내들과 불법적으로 출산한 자녀들을 위해서 종교세금을 더 거둬들이려고 하였다. 도시의 부인들과 여인들은 수도사들에게 위협과 조롱을 가하기 일쑤였다. 여성이 수녀회에 들어가는 이유는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티롤에서는 상류층 귀족 여인이 수도회를 창녀촌으로 만들었다가, 강제로 폐쇄되는 일이 발생했다.

로마 교회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벌이는 교회의 조치들 속에는 물욕, 탐욕, 욕심들이 가득히 담겨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방 교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다. 과연 로마 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목록을 만들라고 한다면, 어린 신학생들이라도 쉽게 지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직매매, 친족등용주의, 장기 부재, 복수임명 제도 등이었다. 성직 취임세라고 해서 첫 해 수입은 모두 다 교황에게 바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어떤 비어있는 자리에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경우에, 교황이 임시직으로 허용하여 정식 임명장이 수여되기까지의 수입을 차지했다.

일반 교구 신부들은 가혹한 세금과 지독한 상납을 평신도들에게 강요했다. 일상적인 교회의 목회사역 활동마다 돈을 요구했다. 결혼식이나 서약, 세례식이나 고해성사, 기름을 바르는 예식, 매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부과되는 금품요구가 있었다. 이것을 거부하거나 송사를 진행하게 되면,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만일 신부에 의해서 한 지역 공동체로부터 출교를 당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가족들은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축제기엘에는 특별한 헌금을 요구했고, 성지순례는 영적인 의무로 신실한 자들에게 부과되었는데 역시 순례자들에게도 금품이 부과됐다.

다섯째,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이 지성사회에 새로운 철학적인 전망을 제공했다. 16세기 초엽 휴머니스들은 "원전으로 돌아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고대 헬라어를 공부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들을 읽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학교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즘으로 학습을 받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공용어이던 라틴어에 능숙했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에라스무스가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누구나 그런 고전들을 해석하여 참된 의미를 찾으려는 훈련을 받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학습방법과 문화적인 환경을 조성해 놓았다.

여섯째, 기술의 발달과 인쇄술의 향상이 이루어져서, 책이 쉽게 보급되었다. 지식에 굶주린 사람들은 책을 구입하여 탐독하였다. 루터와 칼빈 등은 저명한 저술가로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예민한 반응을 계속적인 저술을 제공하면서  이끌어 나갔다. 사람들은 오늘날 메스 미디어를 경청하듯이 공개적인 의견을 담고 있는 책들을 탐독하였다. 예전에는 책값이 엄청나게 비쌌으나, 구텐베르그의 활자술로 인해서 매우 저렴하게 되었다. 이런 저작물의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다.

13세기에 유럽에서는 대학교육에 눈을 뜨면서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학습하면서 고전어 해독능력을 갖추었다. 헬라어를 공부하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문학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많은 평신도들이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맹목적 복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에라스무스와 르페브르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일곱째, 선구자들이 남긴 희생이 확신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에서는 성경번역자 위클리프가 1382년 신약성경을 출간했다. 교황청의 특권주의를 공격하였고, 화채설, 공로주의, 수도원주의, 성자숭배, 미사 등을 비판했다. 사후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해서, 그의 무덤이 파헤쳐졌지만, "롤라드"라고 불리우는 추종자들이 널리 확산되었다. 1458년 보헤미안 후쓰도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서 성경을 강해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그가 처형당하는 장면이 프라하 시내 광장에 우뚝 세워져있다. 사람들은 권위에 대해서 불신하게 되었고, 예정론에 대해서도 신뢰가 흔들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