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

주 제: 신앙성숙
본 문: 창 50:15-17
설 교 일: 2016년 6월 19일
설교제목: 용서의 위대한 힘

오늘의 말씀 제목은 “용서의 위대한 힘”입니다. 창세기 50장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용서의 위대한 힘”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용서의 위대한 힘”, “용서의 위대한 힘”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그 상처로 인하여 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 평생 동안 마음에 아픈 상처로 인하여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고 문제 속에,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그 모든 상처를 치료함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존경받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아들이 아주 문제가 많았습니다. 딸은 모범생이고 학교에서 반장이고 칭찬받는 딸이었는데, 이 아들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밤낮 사고만 칩니다. 밤낮 술 먹고 나쁜 애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니 아버지 마음이 무너집니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날마다 그 아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목사님 내외가 기도만 하면, “우리 아들 돌아오게 하여주옵소서. 돌아오게 하여주옵소서.” 그렇게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목사님이시지만 아들 앞에선 엄한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야단치고 때리기도 하고 그래도 오히려 더 반발하고 더 삐뚤어졌습니다. 두고두고 그것이 목회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모님의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변화시켜 주셨어요. 은혜가 임했습니다. 본인이 회개하고 돌아서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됐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LA지역에서 한 3,000명 큰 대형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됐는데, 그분 책에 보니까 목사가 되고 나서 자기 마음속에 아버지께 받은 상처가 아주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버님과 그 상처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용서받는 이야기를 기록해놓았습니다.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울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어릴 때 받았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던 거에요.

사람은 누구나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상처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또 부부간에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상처, 이런 상처들이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그를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나를 이 같은 상처에서 벗어나게 하여주옵소서. 상처를 치료하여주시고, 내 마음에 주님의 평안함이 넘쳐나게 하여주옵소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그 용서의 모습은 요셉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요셉의 상처와 용서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요셉이 입은 상처
먼저, 요셉이 입은 상처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의 형 10명 형보다 열한 번째 낳은 요셉을 매우 사랑했어요. 창세기 37장 3절로 4절 보니까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얼마나 요셉을 아버님이 편애했던지 형들은 대대로 옷을 물려 입었는데, 얘는 예쁜 옷을 입혀서, “요셉아, 요셉아” 하고 아버님이 옆에 두고 있으니,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미움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저 녀석은 늦게 태어나가지고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네. 아버지 너무하셔. 우리는 아들이 아닌가? 우리는 주워 온 아이들인가? 왜 요셉만 사랑하지?” 여러분, 자녀가 많을 때는 골고루 사랑을 주시기 바랍니다. 속 썩이는 아들이라고 미워하지 말고 더 품어주고 더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속 섞이는 아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속을 썩이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편애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이렇게 미워하는 데도 아버지한테 가서 형들이 뭐 잘못한 것 있으면 이르고, 형들 앞에서는 또 자기가 꾼 꿈을 자랑을 했습니다. 창세기 37장 5절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꿈의 내용이 장차 자기가 높은 사람이 되어가지고 형들이 자기한테 절하게 된다는 그러한 내용을 담은 꿈이었어요. 그러니 형들이 더 미워하지. “아니, 쟤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더니 아주 교만해져가지고, 뭐? 우리가 너한테 절하게 된다고? 우리 곡식 단이 너한테 절을 했어? 해와 달과 별들이 너한테 절을 했어?” 형들이 미움이 분노로, 증오로 바뀌게 되었고, 나중에 기록을 보면 동생을 ‘죽여버려야 되겠다’ 할 정도로 마음에 증오심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아버지 양 떼를 돌보고 있었는데, 먼 곳에 나가 양을 치니까 아버지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아, 요셉아, 형들이 양 치는 곳에 가서 지금 잘 있는지 나한테 보고 와서 보고해라.” “예, 아버지.” 하고 형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형들이 있던 곳에서 멀리 갔어요.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채색옷을 입고 달려오는 요셉을 보자 형들의 마음에 있던 분노와 증오가 폭발했어요.

창세기 37장 18절에서 20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죽여버리자. 뭐? 네가 나중에 높은 사람이 된다고? 네가 죽고 나면 너의 꿈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런데 큰 형 르우벤이 “야, 동생인데 죽이지는 말자.” 그래서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마침 그곳에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이 “형, 형, 집에 돌아가게 해줘. 나 팔지 말아.” 울며 매달렸지만, 형들은 고개를 돌리고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나중에 그 장면을 형들이 기억하고 있다가 후회하는 장면이 창세기 42장 21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입은 첫 번째 큰 상처입니다.

그는 노예시장에서 애굽 시장에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 그 집에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노예로 팔려갔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했기 때문에 주님이 요셉을 형통케 만들어주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형들로 인하여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 잠을 자지 못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더라.” 여러분, 마음에 원한과 분노와 섭섭함을 품고 살면, 그 삶에 끊임없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상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상처가 여러분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어떠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파괴시키고 여러분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비판적으로 만들어서 삐뚤어진 인생을 살게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인정받아서 가정의 총무격으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하게 됐는데, 이제는 또 보디발의 아내, 주인 마나님이 모함을 해 가지고 감옥에 집어넣었어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입은 두 번째 큰 상처입니다. 정말 성실하게 일을 잘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주인 마나님이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노예 신분으로 아무리 변명하려고 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억울한 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물고 뜯습니다. 모함합니다. 끌어내립니다. 여러분, 그때 상처받으면 안 됩니다.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상처받으면 내 자신이 약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모함할 때, 누가 나를 괴롭힐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주여, 내 마음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갇혔음에도 그는 마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원한과 복수의 칼을 품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던지 간수장, 다시 말하면 교도소장에게 신임을 받아서 교도소장이 열쇠꾸러미를 맡기고 “너, 모든 감옥을 돌봐라.”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감옥에 죄수로 들어가는데, 교도소장이 나오라고 해서 열쇠꾸러미를 맡기고 죄수들을 돌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도 그 마음에 상처로 인하여 좌절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함으로 형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이 보통 감옥이 아니라 시위대장 보디발이 직접 관리하는 왕에게 반역한 사람들을 집어넣는 감옥, 특수감옥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정치인들만 들어와 있는 감옥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관급되는 바로의 신하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술 맡은 관원이고,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인데, 그들이 그곳에 와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해주었습니다. “당신은 3일 만에 죽게 될 것이고, 당신을 3일 만에 복직이 될 것인데, 복직되거든 꼭 바로 왕에게 나를 얘기해 주시오. 나는 그러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보아서 알 듯이 나는 죄 없이 이곳에 누명을 쓰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이 “그래, 그래, 내가 당신 해몽한 대로 되기만 하면 나가는 대로 당신을 풀어줄게.” 3일 후에 꿈을 해몽해준 대로 떡 맡은 관원은 사형을 당해 죽고, 술 맡은 관원은 복직되어서 다시 바로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직되는 그 순간, 요셉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요셉은 그가 풀려났기 때문에, “야, 이제 내일 아침이면 내가 특사 명령을 받아서, 특별사면 명령을 받아서 풀려나겠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려서, 나가는 순간 잊어버린 거예요.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가 교도소장한테 물었습니다. “아니, 궁궐에서 아무런 소식이 안 들려옵니까?”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그 2년이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2년이란 긴, 긴 시간이 지나가면서도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는 마음에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이 세 번째 믿었던 사람이 자기를 잊어버린 것이 그에게 세 번째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형들에게, 두 번째는 자기 주인 마나님에게, 세 번째는 관원에게 그가 상처를 받았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만 바라봄으로 모든 상처를 이길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3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함락하고 나서 전례가 없던 대학살이 시작되어서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 학살을 했습니다. 그 기념관에 가보면, 마지막 나온 입구에 캄캄한 벽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7초 마다 하나씩 똑! 똑! 떨어지면서 사진이 하나씩 하나씩 비칩니다. 7초에 한 명씩 사람을 6주 동안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용서하자. 30만 명, 자기 가족, 동포를 죽인 그들을 용서하자. 그 사건은 잊지 말고, 우리가 앞으로 이 같은 일을 행하지 말자.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우리가 은혜 받고 난 후에 달라져야 될 것은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남에게 상처를 갚으려고 하는 그런 삶을 살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주님의 평안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여! 이 평안함을 우리 마음 가운데 허락하여 주셔서 더 이상 상처로 인하여 고통당하지 않게 하여주시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요셉은 그의 삶에 있어서 큰 상처를 준 사건이 세 번이나 있었지만 그들을 다 용서했습니다.

2. 요셉의 용서
둘째로 요셉의 용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 이제는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하겠구나.’ 두려워 떨었습니다. 창세기 50장 15절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그래서 형들이 몰려와서 말합니다. 엎드려 절하면서 “요셉 총리시여, 우리를 벌하지 마옵소서. 우리가 한 때 잘못 생각을 해서 당신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았지만 그건 그때 잠깐 우리의 실수이지 절대로 당신을 망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고통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와서 빌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한 말은 참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셉과 함께하시는가. 그의 이와 같은 신앙 때문입니다. 창세기 50장 19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할렐루야. 때때로 억울한 일 당합니다. 고난을 당합니다. 그때 여러분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재판장이 되어서 복수의 칼을 휘두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 엎드리고 “주여, 내가 이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는데 주님, 아시지요? 주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으로 맡기는 하나님의 큰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 절대 긍정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상처를 받을 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바라보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봤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사랑이 임했습니다. 용서가 임했습니다.

여러분, 용서는 자신을 먼저 치료하는 길인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는 한 그 마음의 상처가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습니다. 나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고 상처를 품고 있는 한 나는 그 상처의 노예가 되어서 늘 미움과 분노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그 누구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다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나는 내 힘으로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주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할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우리를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자기를 조롱하고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런데 용서를 내가 하려면 참 힘듭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용서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것을 말씀하시기 이전에, 22절을 보니까,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갔습니다. 사도행전 7장 59절로 60절은 설명합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미움과 증오는 결코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며칠 전 6월 12일 주일 새벽, 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 한 동성애 술집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백여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50명의 사망자와 53명의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17일은 일 년 전 2015년 6월 17일 미국 전역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찰스턴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수요일 저녁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딜런 루프라고 하는 21세의 낯선 백인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있더니 갑자기 일어나 권총을 난사해서 순식간에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인들은 한 순간에 남편을, 아내를, 딸을, 부모를, 그리고 목사님을 잃었습니다. 범인은 구치소에 감금된 채 화상으로 재판을 받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관행에 따라 사건 이틀 만에 법정에서 폐쇄화면으로 가해자에게 발언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때 유가족들이 놀라운 용서의 말을 건네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딸 네이든 코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갔다. 나는 다시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다시는 엄마 손을 잡지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신다면, 나도 당신을 용서한다.” 얼마나 큰 믿음의 사람인지,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용서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잃은 손녀 엘레나 시몬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다른 희생자들이 증오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모두가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살았으며, 이번 사건도 사랑을 유산으로 남길 것이며, 증오는 결코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유가족들이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모아 발표했습니다. “경건한 크리스천으로서 증오범죄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 자리에 있던 검사가, 검사생활 십여 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당시 찰스턴시의 시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 미친 생각을 품고 찾아왔지만, 이 공동체는 분리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단단하게 결속하고 사랑하고 있다!” 지금도 그 교회에서는 찬양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용서에는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상처 입었으면 그것을 그대로 갚아주려고 합니다. 아니면 몇 배로 더 보태서 갚아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찾아가서 복수하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를 무조건 용서했기 때문에 상처 입히고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그를 상처 입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형통의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할렐루야. 로마서 8장 28절을 다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요셉이 이와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할렐루야. 요셉은 다 용서했던 것입니다. 형들도 용서하고 자기를 누명 씌워서 감옥에 집어넣은 보디발의 아내도 용서하고 자기를 까맣게 잊고 2년 동안이나 지냈던 관원도 용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오히려 자기 앞에 두려워 떨고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창세기 50장 21절입니다.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때때로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에 고난이 담겨있습니다. 고난당할 때, 상처 입었을 때,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상처만 바라보지 말고 위대한 사랑의 본체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용서가 임합니다.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세 번째에 가서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가서 다시 어부로, 옛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물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의 상처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오른편에 던지라.”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가득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저들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이시다. 베드로가 너무 놀랐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또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물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밤새 고기를 잡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피곤해서 지쳤다가 고기를 잡은 후에 그가 풍덩 갈릴리 호수에 뛰어 들었으니 얼마나 몸이 새벽녘에 추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따뜻하게 그의 몸을 녹여주시려고 모닥불을 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자, 와서 아침 먹자.” 아마 베드로는 눈물로 그 아침을 먹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배반하고 이렇게 멀리 떠났는데, 주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모닥불 피워서 추운 내 몸을 녹여주시고 배고픈 나에게 이렇게 아침을 직접 만들어주시니 아마 감격하여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식사를 마친 후에, “베드로야, 너 왜 나를 배반하고 도망갔니?”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를 다 용서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용서받은 베드로는 남은 인생 한평생 우리 주님을 위해서 바쳐 헌신하고 나중에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려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용서의 위대한 힘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한,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한 여러분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상처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고 여러분을 절망케 하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와서 용서하시고 사명을 주신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받는 길이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은혜가 임하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조그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를 품고 아픔을 품고 미움을 품고 살아왔던 우리들의 모습, 우리가 회개하고 오늘 이후 모든 상처를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늘 내 중심적으로 나 혼자만 옳고 내가 받은 상처만 아프고 나만 억울하고 그런 마음으로 고통 속에 살아왔습니다.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후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