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시인의 사랑

이대웅 기자 입력 : 2015.10.15 18:01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시월의 첫날 비가 내린다. 빗소리는 매우 빠르게, 때로는 템포를 놓친 아마추어의 서툰 바순처럼 스스로의 리듬을 따라 이어지고, 나는 오랜 시간 서재에 있다. 과거 속에서 일어나는 파도 하나 같은 흔들림에 그대로 자신을 맡기고 있지만, 창문을 열면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늘 아침 방송의 멘트는 모두 가을의 언어로 시작되었다. 음악 프로그램의 선곡도 가을 일색이다. 게시판의 청취자들은 가을 색의 수식어를 모두 찾아내어 글을 올리고 있는데, 아마도 이 비가 그치면 하늘은 한층 높아지고 대기는 차가워지고 머지않아 북쪽으로부터 서리 낀 바람이 불어 올 것을 알고 있음이리라.

가을 색? 나는 잠시 언어의 뉘앙스를 붙잡으려 머뭇거린다. 우리에게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것이지만, 고독, 슬픔,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가을 색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시인도 가을은 고독을 사는 시간이라 하였다. 고독하기 때문에 때묻지 않은 청결함에 자신을 붙들어 놓을 수 있고, 자신을 위해 건배할 수 있다. 고독한 사람은 내면의 것을 사랑한다. 자신의 내면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원시림의 쓰러진 나무들 틈새의 푸른 싹처럼 피어 있는 자신을 볼 줄 안다.

어쩌면 예술도 자연도 이제까지 가을보다 더 큰 고독과 더 깊은 슬픔과 죽음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생각, 가을보다 더 아름답게 사랑을 노래할 수 없었다는 생각에 당신과 나는 오늘처럼 가을을 미리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슬픔과 죽음을 사는 시간이고, 햇살처럼 꽃향기처럼 찾아왔던 사랑을 다시 사는 시간이라 동의하면서 말이다. 우리 그렇게 살아 까마득한 옛날의 가라앉은 감동을 다시 건져 올리자. 가을 색이란 바로 그러한 시간들의 형상화 아닐까 싶다.

오랜 습관 하나가 나에게 있다. 가을 입구에 들어서면 언제나 고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를 생각하고, 10년에 걸친 고투 끝에 완성한 그의 시 <두이노의 비가(1912-1922)>를 의식을 갖추어 나의 서재로 초대한다.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때였으나 나는 한 건축 회사와의 연재 계약으로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가을날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두이노 성을 찾아갔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는 유고와 접경을 이루는 지역으로 아드리해의 항구 도시인데, 그곳에서 버스를 타면 30여 분 지나 두이노에 도착한다. 두이노는 한 성이 마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내가 두이노를 방문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르네상스가 그에게서 시작이 되었고, 중세와 근세의 분수령이 된 시인, 그리고 평생 동안 베아트리체라는 한 여인을 품고 살면서 그녀로 인해 문학혼을 불태운 청년,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와 릴케 때문이었다.

이끼 낀 석조의 거대한 고성의 주인 백작은 14세기 초에 방랑 중이던 시인 단테를 이 성으로 초대하여 머무르게 하였고, 1911년 10월부타 일 년 동안은 릴케가 이 성의 빈객이었으니, 누구라도 두이노는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릴케가 두이노 성에 머물던 1월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는 성의 절벽 위를 거닐고 있었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그 바람 속에서 시인은 한 목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받아 적었다. 생각해 보라. 광대한 아드리아 해 앞에서의 허허로움과 발 밑 절벽 끝의 고독을.

“아 내가 아무리 외친들, 9계급의 천사 가운데 내 목소리를 들을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렇게 두이노의 비가의 첫 행이 탄생되고, 릴케는 그날 밤 두이노의 비가 제1을 완성한다.

나는 그 여행길에서 과거의 영화로움 때문에 더 쓸쓸한 바닷가에 서서 발 밑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무한 앞에서 유한한 존재를 노래한 시인의 호흡을 들이 마시면서, 언젠가는 죽을 인간이 무한함을 안다는 것이 신의 은혜라는 생각을 하였다.

두이노의 비가는 존재에 대한 릴케의 헌시이고 사랑이다. 존재의 불완전함에 바친 찬가로서 절체절명의 고독을 노래한다. 고독은 가라앉은 감동에서 존재를 걷어올려 거대한 근원으로 향해 나아가며,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게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고독이 깊어지며 사랑이 넓어지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자만이 언제나 새롭게 존재에의 칭송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시인의 말처럼 이제 고독을 사는 시간이 되었다. 창을 열고 바이올린 소리를 다시 들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