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요한복음 4장 46-54절 강해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요한복음 4장에서 이 부분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 채, 간단한 사건이라 간과하는 수가 많다. 지금 예수님은 가나에 계신다. 그런데 가나에서 4-50km 떨어진 가버나움에 왕의 신하가 살았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병에 걸려 고열이 나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 관리는 예수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직접 말씀을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이 계신 가나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찾아와 간절히 호소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가정의 우환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작은 믿음의 불씨로 예수님을 영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시려 믿음의 불씨를 하나 주신다. 이 왕의 신하가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도 예전에 어쩌면 부족함 없이 살았고 평판도 좋고 아무 문제 없이 살았을 수 있다. 그때 주님이 이같은 믿음의 불씨 하나를 던져주셨을 것이다. 어떤 역경이나 가정환경, 질병 등 때문에 ‘주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 내가 믿어 보겠습니다’ 부르짖었을 것이다. 설교자 스펄전은 사람에게 있어 이런 역경이 ‘변화한 모습으로 온 천사’라고 했다. 역경이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변화한 모습으로 온 천사라는 것이다. 이 왕의 신하도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예수님 앞에 갈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역경을 극복해 보려고 하는 이 신하의 마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문이 됐다.

또 한 가지로 이 신하는 나름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날은 불신의 세상이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교회에 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떤 사람의 말은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예수님 한번 찾아가보지 그래? 어떤 사람이 예수님 찾아 갔다가 죽을 사람이 살아났대.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린 적이 있대’라고 말했을 때 이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당시 높은 관리였기에 종들도 거느리고 살았지만, 종을 대신 보내지 않았다. 4-50km라면 낙타를 타고서라도 하루가 걸리는 먼 길이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려고 먼 길을 여행했다.

그렇게 해서 이 왕의 신하는 예수를 만났다. 여기서 강조점은 아들의 병이 나은 것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예수를 믿고 믿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작은 것으로 시작했다. 거듭나야 할 필요, 죄 사함을 받을 필요도 몰랐고, 다만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자 살리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우리의 상당히 유치한 믿음으로도 예수님은 만나주신다.

예수님은 이 왕의 신하가 간절한 필요를 가지고 왔을 때 그것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네 영혼부터 구원받아라. 지금부터 복음 상담을 좀 해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 신하는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다만 그분이 치료하신 이야기만 들었다. 그래서 자기 동네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좀 살려달라고 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이 정도 마음은 있어야 한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하루종일 약대를 타고 갔다면, 아들을 살렸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지식이 많고 머리 속에 영적인 관념이 많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유치하고 연약해 보이는 기도 같아도,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가지고 나아가 낱낱이 구할 수 있는 분이시다.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다. 부드럽게 핀잔을 하신 것이다. 당시 이 신하만이 아니라 많은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못했다. 표적과 기적을 보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하는 주님이 내려오셔서 뭔가 해주셔야만 아들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부드럽게 나무라시면서 그의 믿음을 온전케 해 주셨다. 그런 믿음은 부족한 믿음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게 알 때 분명한 믿음을 갖게 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일에 있어 나름대로의 관념을 갖고 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체험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그대로 순수하게 그냥 믿으면 되는데, 표적과 기사가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다.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완전히 동문서답식으로 대답한다. 이것이 그의 격식없는 기도이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한 마디라도 들어야 제대로 기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그러면 좋다. 그러나 이 사람은 지금 정신이 없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자기 말만 계속한다. 그러나 그 다음 절에 보니 주님이 그 기도를 들으신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사역자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지금 방금 표적과 기사 이야기했지? 그것에 대해 좀 확실하게 깨닫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자’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도 않고 ‘죽기 전에 내려오세요’하는 이 사람에게 ‘내가 내려갈 필요조차 없는 것을 모르느냐?’라고 하지도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나는 도저히 예수님을 닮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항상 너저분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심플하게 할 말씀만 하신다. 화살을 쏘았을 때 과녁에 정확하게 꽂히게 하는 것이 예수님 식이다. 우리는 쓸데없는 말을 너저분하게 하다가 열 개 중 하나 맞추는 식이다. 이러니 예수님과 우리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신하도 뭔가에 홀린 것 같다. 금방 내려와야 한다고 야단하다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묻지도 않고 그대로 ‘아멘’ 하고 갔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렇게 단순하게 믿는 것이다. 우리 식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식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 식은 뭔가 표시가 난다. 나아만 장군은 먼 이방 나라 아람의 사람이다. 이스라엘까지 와서 선지자에게 치료받으려 할 때는 나름 생각한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냥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화가 났다. 그러므로 우리 식으로 생각하고 믿어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축복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있다.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신하는 ‘네 아들이 나았으니 가라’고 하신 바로 시각과 아들의 열이 떨어진 시각이 일치하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병든 자를 일으키는 것은 과거 능력 있는 선지자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신하가 언제 구원을 받았겠는가? 우리는 이 일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주님께 기도도 하고 간구도 했지만 아직 그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는 채였다. 그러나 그 아들이 그분이 말한 그 시에 나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분이 과연 전능자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왕의 신하는 자기와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 하나를 만나 몇 마디 하시고 아들을 한 마디 말씀으로 살린 후 온 가족을 구원하셨다. 예수는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었을 때 온 가족이 구원받았다.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주님은 이렇게 표적을 행하신다.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첫 번째이고, 여기서는 왕의 신하를 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무엇을 믿게끔 하셨는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가 바로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라는 사실이다. 죄인을 하나씩 구원하시는데, 그 방식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눈이 열려 믿게 되었을 그때 구원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이해하고 정확한 믿음을 갖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