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고대 이스라엘의 성도(聖都)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걸어가면 감람산(올리브산) 기슭을 만난다. 감람산 동쪽 경사면에 ‘베다니’ 라는 조그만 마을이 놓여있다. 구약시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협력하여 재건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베다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집’ 또는 ‘아나니아의 집’이라는 셈어적 의미를 지닌 동네다. 베다니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다수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용서받고, 새로운 삶의 소망을 갖게 된 마리아와, 한때 불치의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시몬의 집이 그곳에 있었다.

주후 1세기 당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사람들은 베다니 동네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생애 전도여행 중 베다니를 자주 들러 그곳 사람들과 깊이 교제하며, 간혹 휴식을 취하셨다. 가는 곳곳마다 대적자들이 우글거렸던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 잠시 동안이라도 평화와 기쁨을 선사해 줬던 훌륭한 휴식의 장소가 됐다.

예수 그리스도가 방문하는 곳마다 그를 배척하므로 생명의 위협이 늘 따랐다. 베다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기며, 사랑하며, 이해하며, 섬겨줬던 인물들이 다수 살고 있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자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역에 소망이 생기고 큰 힘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팔을 부축해 주며, 돕는 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 마르다 및 마리아 등 삼 남매였다.

나사로는 베다니에 살았던 주후 1세기 하나님의 사람이며, 헌신적인 두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이다(요 1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우리의 친구’라고 불렀을 정도로 끔찍이 사랑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비롯한 세 남매가 살고 있는 베다니 집을 자주 방문했고,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물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늘 영접하리만큼 그들 삼 남매 가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풍족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방문자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며 나눌 수 있는 부를 누리고 있었다. 막내 동생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것을 보아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사로가 갑자기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사람을 통해 요단강가에 있던 예수 그리스도께 전달했다.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도, 예수 그리스도는 늦게 베다니를 찾으셨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긴급 심방 요청을 받고도 왠 일인지 이틀이나 그곳에 머물다가 늦게 도착했다.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에 도착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요, 방법이었다. 나사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광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했다. 앞으로 교회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나가기 위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에게 절박한 고난이 반드시 필요했다. 고난 없이는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 나갈 리더십을 절대 가질 수 없다. 죽은 나사로와 가족들에게는 잠깐동안 위기가 찾아 왔지만, 하나님에게는 그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이르니, 나사로를 무덤에 매장한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나사로가 누워있는 동굴 입구에 놓인 돌에는 어둠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시켜 나사로의 무덤 앞 돌문을 치우도록 지시했다.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지시와 행동을 눈물로 만류했다.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질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무덤 앞 돌문을 옮겨 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외침이 무덤 속에서 잠든 나사로를 즉시 깨웠다(요 11:43-44).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 나사로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셨다(요 11:2-44).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시신을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소생시키셨다. 어두운 죽음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저버릴 수 없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만방에 선포했다.

나사로의 육신적 소생은 당대 많은 정통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던 일반 대중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신뢰하며, 즉각 열광적으로 수용했다(요 11:45). 반대로 산헤드린 공의회를 비롯한 유대교회의 사악한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소생한 나사로까지 죽이려 위협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헤드린공의회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섬기려고 시도했다.

유대 백성들이 그리스도 왕국의 영적 성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고 황제 중심의 정치를 회복하려는 그들의 희망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사악한 유대교회 지배자들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다(요 11:45-53,12:9-19).

대제사장 가야바는 말도 안 되는 공리주의를 내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맘대로 정당화했다(요 11:49-50). 유대 교회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그들의 잘못된 태도가 민족 국가와 교회 공동체를 어려운 지경에 몰아넣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추구하지 않고,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앞에 앉아 있어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 중심, 민족 중심, 나라 중심 및 우주 중심의 폭넓은 사고를 지녀야 지상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다.

1세기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처럼 지도자들이 이기적 목적과 편협한 가치관을 지니면, 자신들은 물론이거니와 교회와 국가 공동체도 침체와 파멸을 면하지 못한다. 아프리카의 독재들 때문에 국가 경제와 정치가 후퇴한 역사는 그것을 대변해 준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나사로와 마르다 및 마리아처럼 하나님 주신 것을 교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금번 대한민국 서울의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여한 모든 세계 정상들이 자국 중심의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우주적인 생각으로 회의에 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