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1. 사사기는 반복의 역사이다. 그러나 여기의 상황은 단순한 반복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4S 사이클에서 하나가 빠졌다. 즉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회개가 빠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사가 죽으면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데 떨어지게 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열국을 일으키시어 그들을 압제하게 하시며,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킨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롭게 사사를 일으키시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신다.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우상숭배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파셨다. 이들은 40년 동안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 블레셋의 압제 아래 있으면서 거의 그 상황에 동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말라기 이후의 이스라엘과 흡사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회개할 힘조차 없었다. 이때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역사를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간 당하고 있었는데도 돌이켰다거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4S 사이클에서 한 부분이 빠진 것이다. 그들은 압제와 고통의 상황에 익숙해 가는듯 했다. 이때 마음을 졸인 편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해결하시기 위해 좀 특수한 사람을 필요로 하셨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물리적인 억압으로부터 구하는 일 외에 그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고 회개를 촉구할 수 있어야 했다. 삼손 이전에 우리는 나실인의 원칙을(민 6:1-21) 들을 뿐 나실인의 적용과 실례를 보지 못한다. 삼손이 도덕성에서 매우 낮은 상태에 있음에도 다른 사사보다 더욱 감동을 주고 아픔과 회개의 영을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삼손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일으켜짐에서 신약의 개시자인 세례 요한과 주 예수님의 출생을 느끼게 된다.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람이 그러하고, 그를 나실인으로 구별하시는 것이 그러하며,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3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5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7절),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24절) 등의 구절이 구주의 선주자인 세례 요한의 출생과 주 예수님의 나심을 미리 준비하는 듯한 음조이다. 특히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도록 보내심받은 구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공경하는 뜻으로 말하거니와 이런 삼손의 출생은 구주를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연습인 것 같다. 그분은 그분의 택한 백성이 죄악에 사로잡혀서 그 극한 어둠 속에서 아예 구원의 손길마저 찾지 않을 때가 올 것을 아셨다. 그래도 앞의 사사들의 출현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울고 부르짖고 돌이키고 회개할 줄은 알았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범죄와 우상에 친숙해져 그대로 지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파셔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회개와 돌이킴의 기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어둡고 침침한 상황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구원만이 아니라 그들의 회개와 돌이킴까지도 주관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가 그러했다. 온 세상은 죄악에 파묻혔고 사람들은 구원자에 대한 여망까지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침묵 속에 40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기로 하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먼저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자를 바라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예비 사역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그때 그 사역을 위하여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고 그들에게서 요한이라는 나실인을 얻으셨는데(눅 1:5-20), 이는 그로 하여금 먼저 회개의 사역을 하게 하시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삼손이 일으켜진 상황에서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를 이해하는 한 폭의 그림을 갖는다. 우리 하나님은 사사 삼손을 일으키시면서 그분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연습을 하신 것이다. 다시금 공경하는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우리 하나님은 그때(사람들이 죄에 빠져서 구원자를 찾지도 않았을 때) 동정과 사랑이 가득한 심정으로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셨을 것이다.

2.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에서 단지 그가 머리털을 깎지 않고 힘이 센 것에서만 나실인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 나실인은 근본적으로 그의 삶이 하나님께 성별되어 사람들을 회개케 하는 영성의 면을 책임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사 사무엘이 그러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사이다(삿 7:3-14 참조). 세례 요한도 동일하게 그러한 일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독주와 포도주를 멀리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는 것은 특히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회개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손에게서 소위 성별된 삶을 보지 못한다.

다만 사사 삼손의 생애에서 우리는 이전의 다른 사사들에게서 보지 못하는 한 가지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일생 전체가 드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도덕성에서 부족한 면을 보였다 할지라도 그의 온 마음과 온 정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했다. 그리고 온 몸을 드려 이스라엘을 원수에게서 구했다. 우리는 삼손의 역사를 통해서 다만 이스라엘이 구출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뭔가를 더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삼손의 생애와 역사는 슬픔 그 자체이다. 이 면에서 다른 사사들과 다른 것이다.

삼손의 비참한 죽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을 깨어나게 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대속적이고도 포괄적인 죽음(vicarious & inclusive death)의 인상을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 위대한 한 시대의 사사 삼손의 죽음에서 구출 이상의 무언가를 더 느꼈을 것이다. 왜 삼손은 힘 있고 능력 있고 성별된 사사로서 그토록 수치를 당하며 비참하게 고생만 하다가 죽어야 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갔기 때문에 삼손이 그들 전체의 죄악된 상태를 인하여 그처럼 극도의 수치와 아픔을 겪었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사사들의 반복되는 구원의 역사, 특히 삼손의 역사가 참 구원자에 대한 은은한 예표로 세워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삼손은 단 지파 출신이다. ‘단’이라는 이름이 사사 또는 심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창 30:6). 창세기 49장 17절은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라고 말한다. 단 지파에 관한 야곱의 예언은 삼손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사가 삼손임을 인정한다. 유다 지파가 왕의 지파라면 사사 시대에 주목할 만한 지파는 단 지파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 삼손을 소홀히 대우한다. 그러나 사사기는 삼손에 가장 많은 장을 할애한다. 큰 용사인 기드온이나 입다보다도 삼손에 대해 가장 자세하고 길게 기술했다.

삼손과 같은 나실인 사사도 없으며 그렇게 특별한 잉태도 없다. 다른 사사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자세한 스토리도 전달하지 않는다. 삼손같이 끝까지 충성을 다해 자신의 목숨을 다한 사사가 없다. 그는 과연 사사로서의 대표가 될 만큼 힘을 다했던 것이다.

그가 사사로서 일을 수행한 장소인 소라(Zorah)는 처음에 단 지파에 속했으나(수 19:41) 후일 유다 지파에 속했다(대하 11:10). 단 지파는 수함 가족 하나 뿐이었으므로(민 26:42-43) 지파라고도 할 수 있고 가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 지파에서는 삼손의 나타남이 가장 탁월하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단 지파가 이스라엘을 심판한다고 예언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출중한 인물이듯 단 지파에서는 삼손이다. 그는 마지막 사사인 동시에 사사로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족적과 인상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나실인에 대하여는 민수기 6장의 강해를 참고하기 바란다.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그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 11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니이까 가라사대 그로라 12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1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1. 삼손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너무나 오랫동안 타락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고통 중에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위하여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경건하고 신실한 부부를 남겨두시어 그분의 명령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하셨다. 극심한 타락의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사람들을 갖고 계신다. 삼손의 부모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한 것을 보면 그들이 당시 매우 경건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은혜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2. 여기서 우리는 마노아 아내의 행함이 매우 성경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함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에게 나타났을 때 자기 남편에게 가서 잘 설명했다. 그러므로 8절의 마노아의 기도가 있게 된 것이다. 아내에게 계시가 있다고 할 때 남편과 좋은 교제를 나눔으로 남편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여기서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을 가르치듯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했을 뿐이다. 그럴 때 남편도 속에서 직접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9절).

3. 하나님이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으로 다시 나타나셨으나 이번에도 마노아의 아내가 혼자 있을 때 나타나셨다. 그러자 여인은 급히 달려가 마노아를 데려왔다. 마노아는 그분에게 아내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의 원칙을 볼 수 있다. 주님은 남편인 마노아보다 그의 아내를 먼저 찾으셨다. 어쩌면 영적인 면에서 아내가 더 예민했을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의 인도에 대한 인식을 아내가 먼저 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정 면에서는 남편에게 권위가 있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신이 먼저 주님을 보았다 해서 교만하거나 자신이 남편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자신의 위치에서 그녀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한 것이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계시가 있다 하여 위치상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올라서려 하는지 모른다. 마노아 아내는 그런 면에서 좋은 간증을 지녔다. 또한 마노아는 그녀가 자기보다 먼저 주님을 보았다 하여 시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도 왜 자기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지녔다.

4. 그럴 뿐 아니라 마노아는 자기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사자(그때까지 누구인지 몰랐다. 다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귀한 선지자,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8절)를 접대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의 감사의 표시였다. 16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을 조금씩 나타내려 하신다. 그분은 그가 준비한 식물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며 드리려거든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그분을 존숭하겠다고 말하자 여호와의 사자는 그분의 이름이 기묘자라고 하셨다.

‘기묘자’란 ‘비밀’이라는 뜻으로서 절대적이고도 기이하신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이름이다. 이때 나타나신 분은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이시다(사 9:6, 델리취, 랑게, 매튜 헨리, 박윤선).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내셨는데, 첫째는 제물을 불로 사른 것으로(19절의 이적은 틀림없이 기드온 때처럼 제물을 불로 사른 이적일 것이다―6:21), 둘째는 불꽃 가운데로(제물을 사른 불꽃) 좇아 올라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