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김 박사(美 쉐퍼드대학교).
대칭성의 비밀

아름다움의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완벽한 비율과 대칭성에 있다고 한다. 코를 중심으로 양쪽 얼굴이 대칭인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눈동자 한 가운데를 중심으로 얼굴 상하가 1:2, 그리고 양눈과 미간이 1:1:1인 것이 미인 얼굴의 황금 비율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0.1초 만에 상대방의 인체 대칭성을 인식하고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한다고 한다. 대칭성이 완벽할 때 인간의 뇌는 상대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얼굴의 대칭이 완벽할수록 인체는 장수하며, 자손들도 건강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면 얼굴의 대칭성은 유전적이기에 변화되지 않는가? 입모양, 턱의 모습은 인간의 감정과 태도에 따라서 얼굴의 대칭성을 상당히 많이 망칠 수 있다고 한다. 비웃음은 비스듬하게 웃기에 얼굴의 대칭성을 망가지게 한다.

대칭성은 인간의 신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 좋은 구조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영화들은 시작과 끝이 같게 만든다. 건물들도 좌우 대칭으로 만든다. 성경은 이 땅에 있는 것이 하늘에 있는 원형의 그림자 정도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또한 대칭성을 설명한다. 천국과 이 땅의 대칭, 그러나 천국이 총천연생의 입체라면, 지구는 그림자와 같이 단조로운 색상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 속에는 실체와 전체의 중요한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속 구조를 파악하고 더 깊은 것을 안다. 소설가들은 그래서 플롯을, 건축가들은 청사진을, 의사들은 골격과 신체 내부 구조도를 안다. 성경에도 구조가 있다. 십자가의 7언에도 그러하다. 특별히 대칭 구조를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 7언 전체 구조의 암호

우리는 앞선 장들에서 십자가 칠언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복음서 별로 담긴 암호를 해독하였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칠언의 전체 구조 속에 담긴 암호를 해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것들은 각각의 의미는 물론 구조에 이르기까지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암호 해독 포인트

십자가 칠언의 전체 구조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디자인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리고 전체 구조 속에서 파악되는 암호의 의미는 심오하다. 이제 십자가의 7언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고 전체적인 비밀을 파악하여 보자. 크게 십자가의 7언은 두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네번째 말씀을 중심으로 그 전후가 구분된다. 첫번째부터 세번째 말씀은 사람들에 대한 여전한 사역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네번째 말씀부터는 관점이 바뀐다. 그 관점의 중심은 예수님 자신이 된다.


사람과 사역의 관계

첫번째 구조는 예수님께서 구원자 입장에서 사람들과 구원자적 사역을 감당하시는 부분이다.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께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죄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이 말씀은 단지 지금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죄와 악에 사로잡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류를 포함한다.

두번째 말씀의 범위는 더 좁혀진다. 예수님의 두번째 말씀의 대상은 회개한 강도이다. 그 관심 대상이 예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조금 좁혀졌다. 그 회개한 강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낙원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회개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회개하고 예수님 옆에 서있는 사람이다.

세번째 대상은 그 범위가 더 좁혀진다. 세번째 대상은 여자라고 부른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다. 그들은 육신적 혈연이며, 영적인 가족으로 모두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 예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동체 중 가장 핵심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의 새 관계를 정립하여 주신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사역의 완성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의 대상은 모든 죄인을 대상으로 하다가 특정 죄인 중 회개한 사람을 대상으로, 그리고 세번째는 예수님의 육적, 영적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불특정 다수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주시며, 아버지께 간구하고, 특정인의 회개에 낙원을 약속하며, 어머니와 제자에게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여 주는 것으로 사람들에 대한 사역이 전개된다. 사람들에 대한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인 것이다. 그러나 네번째 이후의 말씀은 달라진다.

자신과 사명과의 관계

네번째 말씀에서부터는 이제 메시아로서의 사람들에 대한 사역이 아닌 자기 자신과 사명에 집중을 하신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집중은 죄인의 대표로 버려지신 채 죽으시는 것과 희생양으로 죽으시는 드려지심을 통해 완성되는 사명에 관한 것이다. 이 때부터 말씀의 톤은 상당히 달라진다. 이전의 말씀들은 권위가 있고, 위엄이 있었지만 이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신 처절한 상황을 언급하신다.

네번째 처절한 상황을 표현하시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부르신다. 아버지가 아니다. 왜 아버지가 아닐까? 하나님은 보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죄인을 보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믿든 안 믿든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르다. 아버지는 오직 화해를 통하여 회복된 사람들에 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지금 인간의 죄를 인하여 버려짐을 당한 예수님이 부르는 분은 그런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시점 속에서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심판 받으시고 버려지시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객관적인 분이 아닌 아버지의 따뜻하고 밀접한 관계로 변화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것 중에 하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때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있는 그대로 보시며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들의 악을 고치게 하시며, 선으로 이끌어 주신다. 그 아버지는 우리를 절대로 잃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버지는 이렇게 구분이 된다. 하나님은 믿든 안 믿든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이 확실한 때는 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실 때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지 않으신다. 물론 신약 성경에서 특별히 사도들의 편지에서 아버지와 하나님은 같은 차원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로 성립된 다음에 아버지의 호칭은 아버지일 수도, 하나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관계가 성립된 후이다.

네번째 말씀의 대상은 우선 하나님이다.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대상인 하나님을 부르신다. 그런 다음에 언급하시는 대상은 “나”이다. 나의 버려짐이다. 그리고 다섯번째의 대상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된다. 내가 목마르다. 이것의 숨겨진 의미에 대하여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나의 고통, 내가 온전히 감당하여야 할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온전히 감당하신다.

그러므로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내가 목마르다의 “나”는 이기적이고 주관적인 내가 아닌, 드려지고 피를 흘리며 물을 쏟으며 죽어가고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나이다. 이 말씀은 자아의 버려짐으로 성취되는 자아의 구원을 위한 비밀의 선포이다. 남을 인하여 버려지고, 남의 죄를 인하여 죽어가며 목마른 결핍의 상황을 감당하는 사랑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다음주 계속>

이 글은 <크로스 코드>의 출판사인 비전북하우스 제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