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 목사(본지 이사장, 남서울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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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명종이 어린 조카들 즉, 왕손들을 불러 놓고는 임금이 정사를 돌볼 때 쓰는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고 싶어서 그러니까 한 번씩 써 보거라” 했다. 모두들 좋아하며 한명씩 익선관을 썼다. 이제 가장 나이 어린 선조의 차례가 되었는데 선조는 쓰지 않고 공손히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오리까?” 어린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명종은 깜짝 놀랐다.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선조를 후계자로 삼아야겠구나.’ 작정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선조를 자주 대궐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며 총애하였다. 그런 몇 년 후, 명종이 34세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선조를 왕으로 세우려는 남편인 명종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가 선조를 왕으로 세운다는 교서를 내렸다.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자신이 어떻게 쓸 수 있겠느냐는 겸손함을 보고, 명종은 선조에게 진짜 면류관을 씌워 준 것이다. 겸손하면 세상에서도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 반대로 교만하면 패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벧전 5:5).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만하다. 교만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업적과 상관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인격 속에 교만이 숨어 있고,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라도 그 신앙 속에 교만이 숨어 있다. 조금만 방심하고 우쭐하게 되면 내면에 숨어있던 교만이 소리 없이 그 사람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교만이 무서운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교만이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높게 보는 것이다.” 그렇다. 교만한 사람은 성경을 단순히 참고서 정도로 생각한다.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며 삶의 유일무이한 좌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교만이란 일종의 신앙의 천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동설의 핵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보는 것이다. 지구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한다. 신앙의 천동설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맞추고 살아가야 하는데 내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삶을 가꿔 가시는지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다.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과 함께,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나의 왕 되심을 인정할 때, 존귀한 축복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릴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신다. 겸손함을 통해서 우리가 왕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