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가 연재하고 있는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시리즈를 사랑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그 동안 연재된 부분 중에 명칭과 표현 등 몇몇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를 수정하였습니다. 혹여 이 글을 스크랩하신 분들이 있다면 번거로우시겠지만 새롭게 스크랩 하셔서 정확한 내용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전에 좀 더 정확성을 기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는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선교사이자 (www.In-news.co.kr) 기자인 권현익 목사님이 직접 현장을 누비며 담아낸 이 이야기로, 매주 월, 목요일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1523년 말경 파리에서 두번째 학교 꼴레쥬 몽떼규(Collège de Montaigu)

▲깔뱅의 두번째 학교 꼴레쥬 몽떼규가 있었던 곳의 모습. 1844년에서 1850년에 상트 존느비에브 도서관이 건축된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깔뱅(칼빈)은 좀 더 나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거리상으로 멀지 않은 꼴레쥬 몽떼규(Collège de Montaigu)로 전학을 하여 5년간을 공부하게 된다.

1844년에서 1850년에 깔뱅이 다녔던 학교 터에 현재 있는 도서관이 들어서게 된다. 앞으로 소개하는, 깔뱅의 프랑스에서 목회했던 교회 건물들은 깔뱅 시대의 것이 아니다. 그 터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니까 답사를 해도 그저 역사의 흔적을 보는 것이지 건물을 탐방하는 것은 아니다. 깔뱅이 목회했던 교회들도 그 당시는 그가 쫓기는 몸이었기에 건물을 세울 수 없었고, 깔뱅 이후에 후예들이 건물을 세우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정취를 맛보는 것이다.

▲꼴레쥬 몽떼규에는 에라스무스, 깔뱅, 이냐스 드 로욜라가 다닌 학교임을 알리는 역사 안내판이 있다.
꼴레쥬 몽떼규는 에라스무스가 공부하였던 곳이며, 1528년에는 예수회(Jesuit)를 창설한 이냐스 드 로욜라(Ignace de Loyola, 1491년-1556년)도 스페인에서 유학 와서 공부하게 되는 곳이다. 로욜라는 스페인 명문 가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1528년 37세에 공부하기 위하여 파리 몽떼규 학교에 입학한다. 깔뱅보다 나이는 많지만 후배가 되는 셈이다. 7년을 공부하여 예술 학위를 받는다. 훗날 이냐스 드 로욜라가 만든 예수회는 성 바돌로메 축제일의 대학살 때 위그노를 학살하는 일에 제일 앞장을 서게 된다.

이 학교는 로마 가톨릭 정통 신학을 기반으로 가르치는, 공부하기가 매우 힘든 학교로 알려진 곳이었다. 좀 더 나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전학을 왔지만, 깔뱅이 전학 온 당시 몽떼규는 학교의 질이 떨어지고 있었던 시기이다. 깔뱅은 이 학교에서 감기와 이 떼로 고생하였고, 엄격한 규율에 시달렸다. 회초리가 난무했고 대화는 오직 귓속말만 가능했으며 한밤중까지 힘겨운 영적 훈련을 받았다. 금식 훈련을 명분으로 음식량이 거의 생존할 정도만 제공되었으며, 이곳에서 깔뱅은 평생 고통을 겪게 했던 위장병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스승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메이저(John Major 또는 Mair)로 위클리프(Wyclif)와 후스(Hus), 특히 루터를 반대하고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를 통하여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네 권으로 된 명제들』(Libri Quattuor Sententiarum)을 쓴 삐에르 롬바흐(Pierre Lombard, 대략 1100년-1160년)와 어거스틴(354-430년)의 글을 배우고, 초기 중세 신학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또한 스페인 출신의 안토니오 코호넬(Antonio Coronel)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플라톤의 철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엄격한 중세적 경건훈련을 거치는 동안, 깔뱅은 교황주의에 중독됐을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 전통에 따르는 신학과 철학에 몰두하였으며, 루터의 신학을 이단적인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만약 이런 교육에 계속 영향을 받았다면 예수회를 창설했던 로욜라처럼 깔뱅을 반대하는 철두철미한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몽떼규 시절 깔뱅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된다. 종교개혁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이미 회심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니꼴라 꼽과 그의 형제 미셀과 함께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깔뱅은 그들의 아버지이며 왕의 주치의로 인문주의자였던 기욤 꼽(Guillaume Cop)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인문주의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성향의 그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시기에 깔뱅은 루터의 저술들을 접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톨릭 교리에 충실했으며, 개혁 운동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루터주의적 개혁이 아닌 인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인문주의 가톨릭 교인들이었다.

▲깔뱅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올리베떵이 번역한 성경.
깔뱅은 이 시기에 삐에르 호베흐 올리베떵(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년) -느와용에서 출생하여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사촌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올리베떵은 깔뱅에게 성경을 읽을 것과 로마 교회의 잘못된 의식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훗날 올리베떵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 원문을 바탕으로 1535년 성경 번역을 할 때 깔뱅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는 열쇠이며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거울, 그의 선하신 의지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라틴어 서문을 쓰게 된다.

▲젊은 깔뱅과 사촌 올리베떵.

깔뱅의 제자 테오도르 드 베즈는 “올리베떵은 깔뱅에게 개혁 신앙을 가르쳤던 진정한 사람었다”는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깔뱅은 자신의 신앙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만남을 이 시기에 갖게 된다. 또한 훗날 제네바 종교 개혁 삼총사 중 한 사람인 삐에르 비헤(Pierre Viret, 1511년-1571년)도 몽떼규 학교에서 만난다.

▲개혁신앙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냐스 드 로욜라(사진). 그는 깔뱅과 같은 학교를 거쳤지만 깔뱅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만약 이러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깔뱅도 이냐스 드 로욜라(Ignace de Loyola)처럼 개혁신앙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웠지만 두 사람의 장래는 서로 달랐다.

좀 더 나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몽떼규로 온 깔뱅은, 학교에서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할지라도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깔뱅이 파리에서 첫 5년의 시간들은 스승 꼬르디에, 출판자 호베흐 에스띠엔느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내게 되며, 이 만남들이 훗날 깔뱅으로 하여금 개혁의 급류에 동참하게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