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 또는 신성한 죽음이라는 말로서 사용되는 안락사는 현대사회에서 이젠 거부 반응 없이 우리에게 친근한 용어가 되었다. 심지어 인간뿐만 아니라 고래가 해변가에 떠밀려와서 바다로 가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을 때 고통스런 죽음을 감해 주기 위해 고래를 폭탄으로 살상하는 것도 이제는 안락사 시켰다고 말하게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안락사라는 용어는 1920년 칼 빈딩(Karl Binding) 과 알프레트 호헤(Alfred Hoche)가 공저한 "무가치한 생명의 파괴에 대한 해제"(The Release of the Destruction of Life Devoid of Value)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몇 년 전 미국의 안락사 의사의 대부인 잭 케보키안(J. Kevorkian)이 그 동안 은밀하게 자신의 환자를 약 130명 정도 안락사 시켰는데 극기야 자신의 환자 가운데 한사람을 직접 주사기를 통해 독약을 주입하여 살인하는 장면을 전 미국에 방영함으로써 안락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터뜨렸다.

또 작년도 네덜란드는 의회가 안락사에 대한 법률제정을 결의한 데 이어 자살 약을 시판하기로 하는 등 세계에서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시킨 나라가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나라 의료계에서도 소극적 의미에서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내부지침을 작성하여 안락사 문제가 우리사회의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http://www.kma.org)가 제정한 현행 의사윤리지침에 의하면 '의사는 안락사에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고 되어있고 이러한 규정을 위반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라고 되어있다. 또 안락사에 대한 정의를 환자의 감내할 수 없고 치료와 조절이 불가능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환자 본인 이외의 사람이 환자에게 죽음을 초래할 물질을 투여하는 것을 지칭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락사는 영어로 "Euthanasia"로 쓰는데 그 어원이 헬라어에서 왔는데 여기서 "Eu"는 영어로 "good" 혹은 "easy"이며 "thanasia"는 영어로"death"이다. 따라서 합성적인 의미는 좋은 죽음 혹은 쉬운 죽음이다. 현대에 와서는 사전에서 "mercy killing" 즉 자비로운 죽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는 안락사를 만드는 방법에서 '능동적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로 분류한다.

안락사는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기 환자가 죽음 이외에는 고통을 이겨낼 방법이 없을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다. 능동적인 안락사는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치사 약을 주입함으로써 죽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적극적 안락사'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살인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것으로서 '수동적 안락사'란 환자에게 필요한 어떤 의학적 조치를 하지 않거나 인위적인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자연의 경과에 따라 죽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소극적 안락사라고도 부른다.

또 안락사는 환자가 자기의 원하는 의사에 따라서 분류되는데 '자발적 안락사'란 환자 스스로가 안락사를 원하여 직접 요청한 경우에 불리워지고, 반대로 환자가 자기의 의사표현을 할 수 없을 때 시행되는 것을 '무자발적 안락'사라 하며, 마지막으로 환자가 죽기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시행될 때 '비자발적 안락사'라고 한다.

현재 세계적인 추이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분위기 조금씩 흐르고 있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그 소중함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능동적이며 자발적인 안락사를 반대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할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생명이란 과연 나 자신의 소유물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질문이다.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현대에 사는 인간은 자신들이 몸과 생명에 대하여 잘못된 소유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주체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타락한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게 되었다. 이런 사상은 결국 인간을 극단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부상시켰지만 과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성경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 그 주인이 하나님이며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선물을 감사하게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책임이며 봉사이다. 인간은 생명을 파괴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방어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안락사에서 우리는 생명과 관계된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된다.

안락사 문제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말기 환자의 고통이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 그 고통을 즐거워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병으로 인해 아파하고 슬퍼하며 살아간다. 바로 병은 인간의 반역으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훈련의 수단이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가 스스로 만든 고통의 결과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으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의사도 약도 필요 없고 이 땅위에서 장수의 노력을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도 몸의 건강함과 의사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문제는 고통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현재 안락사를 시키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고통이라는 것이다. 환자가 인간으로 그 존엄성을 해쳐가며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 나쁘기 때문에 죽음을 앞당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은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고통이 계속된다. 이것은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참고 인내하고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그 고통과 싸우는 그 모습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고(suffering)로 보고 이 세상을 해탈하는 힌두교와 불교의 철학은 우리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케보키안의 안락사의 시술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

안락사의 시행이 합법화될 경우에 예측 되는 것은 그 시행이 걷잡을 수 없이 다양한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는 인간 생명 파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어리석은 제정이 될 것이다. 이제 육체적인 고통에서 영원한 해방을 외쳤지만 앞으로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그 해결책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또한 복잡한 현대인간에게 사소한 스트레스나 조그마한 아픔도 안락사로 이어질 것이다.

안락사는 빈곤층의 고통을 쉽게 해결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경제적으로 고통 당하는 가정의 경우에 말기의 환자의 문제를 경제논리로 따져 간단하게 처리하는 근거를 제시하게 된다. 물론 고통 당하는 가정을 위해 국가와 사회 그리고 지역과 교회가 함께 그 고통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로서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고통을 그 당사자들에게만 방치한다면 그 환자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고통과 인권은 유지될 수 없다.

생명말기의 중증환자들에 대한 주변의 의무가 영생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지니게 하고 죽음을 믿음 안에서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건전한 호스피스 운동의 활성화가 시급하다. 현재 국내에서는 미약하다.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는 그 제도가 매우 우수하다. 정부와 기독교 단체에서 속히 호스피스 정신을 대안으로 준비해야 한다. 가족이나 자신의 공동체가 그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이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삶을 아름답게 결산하고 앞으로 올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서 경건하게 주의 부르심을 기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통하여 우리는 고통을 어떤 종교들의 주장처럼 무조건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재정립하고 이 세상이 결국 천국이 되지 못함을 인식하게 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삶의 시작인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고통을 역설적이며 종말론적 기쁨의 시작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안명준교수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