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리셋

김관선 | 두란노 | 256쪽 | 12,000원

1517년 복음의 변질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내년은 그 500년이 되는 해다. 구교와의 종교 전쟁과 핍박 속에서도, 개신교는 세를 넓히며 성장 신화를 써내려 왔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갱신을 표방하며 생겨난 개신교의 처음 저항 정신은 퇴색한 지 오래다. 이 상황에서 '조금씩의 진화와 개선만 있으면 되는가' 아니면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가'를 놓고 봤을 때, 나는 늘 후자를 생각하곤 했다. 교회는 이미 해도 너무하고, 너무 멀리 왔다. '이건 정말 아니다' 하는 정도까지.

이런 마음에 답이라도 해 주듯 <리셋>이라는 책을 낸 분이 있다. 그는 여느 저자 목사님과는 달리, 프로필에 본인의 교회 이름과 위치를 내세우지 않는다.

연말이면 교회마다 달력이 넘쳐난다. 거기에는 교회라는 조직의 보스와 주인은 본인 한 명이라는 듯, 담임목사님의 이름이 크게 새겨진다. 기독교방송에 나와서도 본인의 교회를 너무 드러낸다. 목적이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교회를 홍보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다르다. 22년째 담임목사로 교회 사역을 하면서, 잘못된 믿음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래서 형식에 갇혀 퇴행하는 신앙생활의 모습들을 바꾸고 싶어했다. 교회 생활은 강요된 헌신이나 왜곡된 신앙이 아닌 자유와 기쁨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생명력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오랫동안 복음, 교회, 예배, 가정이라는 개념을 성경의 말씀 안에서 바로잡아 보려 노력했다. 이런 도전의 말씀들이 책 한 권으로 묶였다.

그럼에도 처음 느낌엔 책 표지가 특징이 없을 만큼 평이했고, 화면으로 찾아본 저자의 모습과 목소리도 기존의 목사님들과 같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들어맞아 보였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를 짜깁기하지 않은 그의 설교는 달랐고, 확신에 찬 어조가 깃들어 있었다. 꾸미거나 드러내지 않는 저자의 글 속에서 진정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컴퓨터나 핸드폰을 사용하다 잘 안 될 때 '껐다가 다시 켜 보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그렇게 하면 방금 전의 문제가 뭐였냐는 듯 감쪽같이 해결되곤 한다. 초기화를 하면 얽혔던 파일들이 제자리를 잡아, 똑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곡된 복음이 신앙인 양 숭상되는 복잡한 현실의 교회에도 이 초기화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그는 먼저 복음의 초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어떤 내용이 복된 소리로 들리는가. 미운 사람들이 다 망하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 혹은 로또 당첨으로 안정된 경제를 갖게 되는 것? 어떤 일에 노력 대비 대박의 결과를 얻는 것? 아니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전혀 다르다. 핍박 없고 원수 없는 편안한 상태가 복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복이다. 돌에 맞아 죽지 않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용서하며 평온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로 인해 누군가 배부르고 즐거울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복음이다. 지금 웃고 배부르고 칭찬받는 것, 지금 가진 것들이 복이 아니라, 그날을 위해 좀 더 가난해지는 것이 복이다. 적극적으로 베푸는 게 복이다.

광고인 박웅현은 그의 글에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책은 도끼'라고 말했다. 우리의 얼어붙은 지식을 깨고 기존의 편견을 넘어서는 것이 독서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성경 속의 말씀임에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착하면 손해 본다는 고정관념을 넘어, 적극적으로 착해야 한다. 착함이 세상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분하는 잣대다. 착함은 사랑하는 그를 위해 불이익을 받더라도 악을 악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성전 정화를 위해 채찍을 휘두르고 바른 소리를 하다 미움받아 죽임당한 것처럼, 사람들은 옳은 소리하는 사람을 불편해한다. 알지만 그렇게 못 살고 있는 자신들의 비겁한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한 소리,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다.

이렇게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했다면, 예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어릴 때 내게 예배는 지루함을 견디며 인내를 길러가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예배에 빠지면 막연한 죄의식에 시달렸고, 자유함이 없었다. 그래서 전도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배의 개념조차 몰랐었다. 나 혼자만의 잘못에 기인한 건 아니었지만, 시간을 허비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일찍부터 예배의 참뜻을 알고 성공한 예배자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는 말한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지키지도 못할, 또 성경적이지도 않은 법을 제시하며 수많은 성도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예배로 주 안에서 자유하며, 매일 기뻐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의 최고 형태는 예배다. 맞는 말이다. 예배 아닌 각종 일과 부담에서 벗어나야 본질 아닌 것에서 본질로 돌아올 수 있다. 하나님은 일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능력이나 학식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것이 그분과 우리의 행복한 속삭임이요 소통하는 방법이므로.

그러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예배다운 예배를 잃은 지 오래. 이미 보험 회사처럼 변해 버렸다. 주일 성수를 잘하고 헌금을 많이 낼수록 보장받는 안정의 범위가 넓어진다고 말하는 듯, 자본주의 시스템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개인의 안녕을 보장해 주는 곳이 아니다. 내가 편의와 안녕을 얻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가 교회다. 나만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원하는 모습들. 현대 교회가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우리'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처음엔 신실하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목회자도, 가다가 자기가 주인이 되고 변하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어느새 나의 개인적인 욕심들이 싹트면, 결과는 어린왕자의 별을 바오밥나무가 웃자라 잠식해 자신이 발디딘 별 자체를 쪼갠 것처럼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탐욕과 대형화를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채찍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폭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판을 피하려면 절대 내 교회만 살찌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돌이켜야 한다.

아름다운 결속과 진정한 유대로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면서도, 교회는 폐쇄되고 고여 있는 것을 넘어 세상 속으로 흩어져야 한다. 빌립처럼 성령을 받아 '사도성'을 회복하고, 세상 속 모두의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교회는 상상만 해도 뿌듯하고 바람직하다.

교회가 이러해야 한다면 우리 시대의 가정은 어떠한가. 그동안 교회는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 칭하며 가정을 희생 제물로 딛고 선 면이 있다. 가정보다, 예수님보다, 교회 자체에 충성하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게 했다. 신앙인을 만들기보다는 자기 교인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인은 분주하기만 할 뿐, 예수의 능력을 경험하거나 그 말씀의 능력을 내 삶에 적용하는 신앙인이 되지는 못했다.

교회는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보다, 좋은 엄마, 좋은 아버지를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가정은 부모들이 화목하고 자녀들을 믿어 주며 편안하게 해 줄 때 이루어진다. 좋은 가정에서부터, 그 행복해진 구성원에서부터 진정 좋은 교회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돈 잘 버는 아버지와 그 윤택함을 힘입은 복부인 엄마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요한 같은 태중의 아이든, 사가랴 같은 노인이든, 성령 충만의 열매를 받은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함께 천국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저자는 용기 있게 말하다가 미움받아 죽임당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말씀의 본질로 돌아갈 용기를 내라고 주문한다. '알자 알자 힘써 주를 알자'고 한 선지자처럼, 제대로 아는 은혜가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 내어,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죽으면 죽으리라'던 용기를 가졌던 에스더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도 제대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가 모든 속박을 끊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제 그분처럼 자유하자. 그런 진정한 자유의 누림은 처음의 본질로 돌아가 '리셋'할 때 가능할 것이다. 옷의 단추를 잘못 잠근 것을 중간에 알았다면, 지난 건 놔두고 앞으로만 잘 채우면 된다고 할 것인가. 과연 그 옷을 입고 나갈 수 있을까.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똑바로 채우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우리 모두 우중충한 회색빛 의무의 옷을 벗고, 단추 잘 채운 무지갯빛 밝음의 옷을 입자. 그리고 행복한 의무요 권리인 예배를 드리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한, 생동감 넘치는 진짜 예배를!

/옥은숙 사모(책과 교회를 잇는 오솔길이 되기를 소망하는, 목회자의 아내. 포항 CBS '책 읽는 엄마' 패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