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하려면, 말하는 법 배워야
공감 위해 말로만 넘어 잘 들어야
좋은 전도자 되려면 쉼 없는 학습
침묵, 구원받고 감사하지 않는 것

최더함 교수(마스터스세미너리 책임교수)
▲지난 3월 개혁신학포럼에서 강연하던 최더함 목사. ⓒ크투 DB

마스터스 제4회 특별강좌가 ‘예수님의 7가지 스피치’를 주제로 지난 2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바로선개혁교회(담임 최더함 목사)에서 개최됐다.

특별강좌에서 최더함 목사는 이날 ‘예수님의 7가지 스피치’라는 주제로 예수님의 언어를 배우자는 취지의 강좌를 진행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려면,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래서 예수님의 스피치를 7가지로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날 강좌에는 현장 30여 명, 온라인 70여 명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최더함 목사는 “한국인들이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만 받다 보니 논술 교육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며 “암기에는 능숙하지만 창의적·비판적 사고가 부족하다. 논술 교육이란 다른 것이 아닌, 말과 글을 잘 하는 훈련이다. 품(品·품격이나 품위)은 입(口)이 3개다. 말이 쌓이고 쌓여서 품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품은 말에 달렸다”고 운을 뗐다.

최 목사는 “언품(言品·말의 품위)에서 언향(言香·말의 향기)이 나온다. 시끄럽지 않고(not noisy),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benefit),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not selfish),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listen carefully), 진실함이 담겨야(truly) 한다”며 “뿐만 아니라 공감을 사고자 할 때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일종의 전도다. 그들에게 공감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고 했다. 듣는 것으로 마음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전라좌수사에 부임하면서 서재 운주당(運籌堂)을 둘러싼 대나무를 다 베고 주변에 개방해 찾아오는 이들과 널리 대화하며 경청했고, 이를 통해 바다와 물길을 배워 승리할 수 있었다”며 “반면 원균은 부임 후 운주당을 대나무 숲으로 두르고 소통을 막아 정보가 차단됐고, 결국 패전하고 말았다”고도 했다.

최더함 목사는 “예수님은 교육 방법에서도 가장 유능한 교사였다. ‘선생’이라는 칭호는 그의 대적자들도 인정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와서도 그를 함부로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 호칭했다(마 22:16)”며 “교사로서의 예수님은 오늘날 교장선생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눅 5:5, 8:24, 45, 9:33, 49, 17:13)’, 유대 사회에서 매우 존경받았던 ‘랍비(마 26:49, 막 9:5, 10:51, 11:21, 14:45)’, 그리고 흠정역이 ‘Master’로 번역한 ‘디다스칼로스’ 등 세 가지로 불리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는 방법과 기술을 익히지 못했기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며 “예수님의 전달 방식을 익히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 모두 좋은 전도자가 되기 위해 쉼 없이 학습하고 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침묵은 구원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는 최더함 목사가 ‘예수님 가르침의 독특성과 위대함’을 7가지로 정리했다. 매달 열리는 마스터스 특별강좌는 5월부터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열린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최더함
▲최더함 교수가 지난 21일 바로선개혁교회에서 강의하고 있다.

1. 야외에서 주로 가르치셨다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가르치려면 뛰어난 소질과 교수법을 터득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단번에 휘어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을 모으지도 못하고, 모은다 해도 실내 강단처럼 청중의 시선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야외에 모인 어수선한 청중을 사로잡으려면 특별한 능력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낮고 빠른 속도가 아니었지만, 단숨에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산상설교에서 숨을 죽이고 완전히 예수의 설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추정할 수 있다. 설교가 끝나기까지 아무도 중간에 일어서거나 불평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일타강사’를 넘어 ‘특타강사’이셨다.

2. 보편적인 호소로 공감을 사셨다

어떤 종류의 청중을 대해도 똑같이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내와 야외 구분 없이, 어디서든 청중을 사로잡는 특별하고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야외 교육은 즉석에서 이해시킬 재능을 가져야 한다. 야외 설교자는 투명하고 명확하게, 명쾌하고 단순한 표현들을 통해 감화 감동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보편적 호소력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다.

예수님 교수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그가 말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와 이야기로 설득했다는 것이다.

3. 경구를 통해 기억하도록 만드셨다

오늘날 교사들은 가르친 내용을 인쇄해서 기록으로 넘겨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쇄물이 나오기 훨씬 전에 가르치셨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예수님은 그래서 특별한 방식을 사용했다. 바로 잊혀지지 않는 ‘경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구에는 생동하는 진리가 담겨 있다. 주님이 전해주신 경구가 살면서 중요한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며 살아난다. 한 마디 경구가 영혼을 살린다. 사람의 말 한 마디는 천냥 빚을 갚지만, 하나님 말씀 한 마디는 영혼을 살린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리라(마 23:12, 눅 18:1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4. 역설(paradox)을 사용해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리셨다

역설은 처음 들었을 때 쉽게 믿어지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수도 있다는 확신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역설을 통해 사람들은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기존 것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대표적인 역설은 팔복 이야기이다. 이 가르침은 기존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 가르침은 세상 가르침과 정반대이지만, 갈수록 진리의 메시지로 사람들을 장악했다.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
▲덴마크 화가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1834-1890)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1877)’.

5. 생생한 과장법을 사용하셨다

진리를 강하게 새기기 위해, 충격적인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완전한 무감각 상태에서는, 흔들어야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때로 충격적인 발언으로 좌중을 압도하셨다.

“네 오른 눈이 너를 범죄하게 만들거든 빼어버리라 네 오른손이 너를 범죄하게 만들거든 찍어버리라(마 5:29-30, 막 9:43-48)”.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이 말씀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찌르는 듯한 자극을 주기 위해 주저없이 파격적 표현을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너무 몰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주님은 정곡을 찌르며 진리를 사람들에게 집어넣으셨다.

6. 유머와 비유를 적절히 사용하셨다

경직된 어투와 얼굴 표정과 자세는 전달 효과를 감소시킨다. 상담가들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미소를 짓고 웃으면서 하라고 조언한다. 미소와 함께 들려지는 진실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은 없다. 예수의 말에는 위트가 담겨 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과 의심의 문고리를 풀어버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예수는 서로의 잘못을 발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느냐(마 7:1-5)”고 말했다. 이는 일종의 위트요 유머다. 사람들은 들보와 티끌 비교를 들으며 웃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박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진지한 것과 침울한 것이 다르듯, 밝고 긍정적인 것과 가볍게 웃고 떠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예수님은 군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생활 일들을 소재로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다. 예수의 비유는 ‘천상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였다. 특히 비유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이야기 전달 방식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 속 재미있는 비유와 이야기를 ‘난롯가에 모여앉아’ 어른들에게서 들으며 자랐다. 노아 홍수 이야기, 다윗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는 나단의 용기 있는 비유(삼하 12:1-7), 하나님의 포도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하는 이사야의 비유(사 5:1-7) 등을 들으며 즐거운 상상력을 키워갔다.

비유는 강요하지 않는 교육 방식이다. 비유는 ‘이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설명하고, 판단은 청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유대 속담에 “진리는 결코 알약이나 주사와 같이 사람에게 주입돼선 안 된다”고 하듯, 진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권고를 받는 인간이 자발적인 마음으로 찾아 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와 같다.

모든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미래의 ‘거기’로 옮겨 가셨다. 자신의 이야기를 땅에서 시작하시고, 하늘에 다다랐다. 우리의 시간에서 시작하시어 영원에서 마치셨고, 죄인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로운 신분을 가진다는 소망으로 이끌어 가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이 다 접하고 느끼는 일상의 일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달하셨다. 들판에서 말씀하실 때 밭에서 자라는 곡식을 비유로 들었고, 들판에 핀 백합화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심지어 집안의 사소한 물건들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두막집 부엌에서 빵 굽는 여자, 마룻바닥에 널려진 물건들 속 사라져 버린 동전 한 닢, 길을 잃고 해매는 양 한 마리, 집을 나간 탕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중 강도를 만난 사마리아 사람, 세관 앞에서 홀로 앉아 있던 마태,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삭개오, ‘차도남’인 나다나엘을 부르신 이야기 등.

예수님께서 전한 진리는 크고 놀랍고 화려하고 SF 공상과학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었다.

7. 완벽한 논리로 가르치셨다

W. A. 커티스는 예수가 사용한 논리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 간접 증명법

소위 ‘귀류법’으로 불리는 이 논리는 ‘어떤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려 할 때, 그 명제의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결론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마귀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며 “귀신 들렸다”고 힐난하자,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고, 또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가정도 버티어 나갈 수 없다. 만일 사탄의 나라가 내분으로 갈라진다면 그 나라는 지탱하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막 3:23-26)”이라고 그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논리를 가지고 반대자들의 주장이 잘못임을 밝히셨다.

② 딜레마와 침묵의 논리

‘딜레마’(dilemma; di=두 번, lemma= 제안, 명제)는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를 가리킨다. 두 판단 사이에 끼어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사람들이 갑자기 간음하던 중 여인을 잡아 예수 앞으로 데리고 왔다. 예수가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면 자신이 지금까지 설파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어떻게 베풀 것이냐를 두고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을 비난하는 대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라(요 8:7)”며, 조용히 땅에 앉아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침묵으로 기다리셨다.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침묵의 논리로 극복했다.

또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고발하려 하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막 3:4)”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역으로 딜레마를 제시하심으로써 제압했다.

③ 이중 대조법

이것은 하나의 사실에 대해 동일 선상의 다른 논리를 비교, 제시해 앞의 사실을 반박하는 방식이다.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나님게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 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