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장 45-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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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본문은 주님께서 빌립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빌립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곧바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나서 빌립은 가까이 하던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나다나엘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전달하는 말을 믿기 어렵다

전달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문 제기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5-46절)”.

나다나엘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돌로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먼저 부름을 받은 6명의 그룹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안내를 받았지만, 빌립의 전하는 말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고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도시로부터는 빗겨나 있는 시골스런 외딴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거나 관심을 끌만한 지역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사렛은 유난히 척박한 시골인데다 평판이 좋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고 반문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 들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만한 말입니다.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말입니다. 나사렛이라는 지역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발언은 지역감정을 촉발시킬 망언까지는 아니라 해도, 잘못 말한 실언(失言)이 될 것입니다. “그런 하층천민의 달동네에서는 도저히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속단이기 때문입니다.

인물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태어난다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살펴 나가면, 정확성을 요구하는 나다나엘의 성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구약 예언에 모순점이 있다

구약의 예언과 너무나 다르다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절)”.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한 것에 의아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빌립의 소개에서 곧바로 모순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메시야 예언이라면, 오신다는 메시야는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되지 않느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라니?”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지역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기는 해도, 구약의 예언에는 상당히 지식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빌립 역시 주님의 베들레헴 탄생이라는 사실만은 몰랐던가 봅니다. 만약 빌립이 나사렛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전달했다면, 나다나엘에게 그런 반문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베들레헴은 요셉과 마리아가 실제로 거주하던 지역이 아니라, 주님의 출생장소입니다. 갑자기 황제 아구스도의 호적령에 의해 부득불 길을 떠나는 중에 베들레헴에서 출산했습니다.

게다가 요셉 부부는 천사의 다급한 독촉으로 애굽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헤롯이 죽은 후에 주님은 나사렛으로 돌아와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사렛을 주님의 출생장소로 혼동했을 만합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의문을 가진 이유입니다.

3. 존재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존재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나다나엘이 제기한 질문입니다.

“메시야라는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 이름도 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는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주님의 존재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는 나다나엘의 질문을 우리는 신앙이라는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시고 나서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전혀 없다”고 칭찬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질문은 작은 마을이라고 무시하고 빈정대는 것보다는 오히려 철저하게 성서를 근거로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나다나엘은 그 순수한 마음을 가졌음이 분명합니다.

나다나엘은 아마도 메시야는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작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rone, 1804-1864)이 쓴 작품, <큰바위 얼굴> 같은 그런 사람으로 말입니다.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서 도야된 그런 큰 인물이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나다나엘을 칭찬한 신앙인격과 어울리게 맥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다나엘의 성격에서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단편적인 생각보다는 양면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세상에 살면서 행복한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일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많은 사람의 부러움과 칭찬을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을 만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로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좋은 일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의 사역자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