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에 휩싸여 범죄를 두둔하지 말라
인질을 지켜주는 납치범 따위는 없다

레인보우리턴즈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정의당사 앞 기도회
▲매주 토요일 열리는 정의당사 앞 차별금지법 반대 기도회 현장. ⓒ크투 DB
공포는 판단을 흐리게 한다. 종합적인 사고를 정지시킨다. 경험을 통해 쌓아온 모든 지식을 날려버리고, 눈앞에 놓인 상황만 보게 한다. 시야를 좁힌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벌어졌던 한 사건은 공포가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준다.

두 명의 강도가 은행을 습격했다. 6일 동안 네 명의 인질을 데리고 경찰과 대치했다. 여기서 괴이한 일이 발생한다.

납치범들과 인질들 사이에 정서적인 애착 관계가 형성됐다. 인질들은 납치범들에게서 풀려날 때, 그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심지어 감옥으로 호송되는 강도들의 안전을 걱정하기도 했다.

납치범은 가해자, 인질은 피해자. 보통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원망한다.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 강도들에게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 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공포는 비정상을 만든다. 강도들은 인질들의 생명권을 장악했다. 언제든 생명의 불씨를 꺼뜨릴 수 있는 존재가 됐다. 공포로 마비된 은행 직원들에게 조금씩 호의를 베푼다. 자신이 왜 강도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사연을 들려준다.

갇혀있는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요구 조건을 거부하는 경찰들 때문에 빨리 풀어주지 못한다며 공동의 적도 만든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인질들은 강도들의 호의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게 기만당한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교회가 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 절, 성당, 민주노총에게는 대면 집회가 허용되지만, 교회만큼은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게다가 8.15 이후에 보도된 ‘오보(誤報)’들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을 교회로 몰았다. 생업을 잃어버릴 위협에 놓인 국민들은 교회를 원망하고 있다. 교회는 위기를 느꼈다. 공포와 직면했다.

공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판단력을 잃어선 안 된다. 9월 7일 ‘OhmyNews’에 카타콤 교회 양OO 목사의 글이 소개됐다. 그는 ‘개신교 혐오의 시대에 차별금지법이 교회를 지켜줄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논리에 동조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교회들이 있다. 판단 미스(miss)다. 납치범에게 보호받았다고 착각한 인질과 같은 심리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주님의 뜻이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전해야 한다. 교회가 받은 명령이자, 정체성이다.

차별금지법은 이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교회는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수 없다. 혐오를 조장한다는 느낌을 주는 모든 구절을 설교할 수 없다.

‘세상’이 듣기 좋은 말만 해야 한다. 말씀이 사람의 입맛,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의 취향에 맞춰 재단(裁斷)된다. 불순종이다.

종교의 자유를 핑계로 전도 또한 금지된다. 신앙을 전할 자유는 ‘혐오 행위’로, 듣지 않을 자유는 전도를 억압하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자유의 납치다.

머리의 명령을 거부하는 몸이 건강한 몸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교회가 참 교회인가?

공포에 휩싸여 범죄를 두둔하지 말라. 인질을 지켜주는 납치범 따위는 없다.

조성호
▲조성호 청년.
조성호 (1989년생)
침례신학대학원 재학
차별금지법 반대 청년연대 회원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회원
(사)대한민국 통일건국회 청년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