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도들, 자신의 행복 위해 사는 것 같아
주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이는 교회 되어야
내가 먼저 주님으로 인해, 변화 노래할 수 있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찰스 쉘던 | 손현선 역 | 선한청지기 | 432쪽 | 15,000원

기독교 신앙 소설의 고전으로 불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손에 잡게 되었다. 소문으로만 익히 알고 있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완역본을 읽게 된 것은 처음이다.

1896년 출판되자마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도 번역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큰 도전을 주고 있다.

저자인 찰스 쉘던은 이 이야기를 설교 식으로 섬기는 교회에서 선포하게 됐고, 이것이 출판사에 연재된 다음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잃어버린 교회를 아파하며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될 것을 그리고 있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성도를 회개하며 주님의 향기가 나타나길 설득하고 있다.

책을 보면서 제일 찔리게 된 것은 성도가 거듭나고 교회가 새로워지기 전에, 그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청중에게 필요한 위로와 감동과 도전을 주고, 편안하고 쉽게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자신의 안위를 살피며 무난하게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감각한 성도가 아니고, 건물만 화려한 교회도 아니다. 교회의 가치는 크기와 비싼 재료와 멋진 프로그램으로 결정되는게 아니다.

교회 안에 자본력이 있고 유능하고 인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좋은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사회가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빛이 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백화점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다 들어주기보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관심과 목적을 두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의 영이 머무는 교회가 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한 늘 교회는 사회의 필요와 사람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 같다.

성도 또한 교회를 다니는 여러 이유가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지쳐 외로워서 오기도 하고, 자신의 미래를 잘 세우기 위한 배우자를 찾으러 오기도 한다.

교회에 오면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유력한 인물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서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오기도 한다. 눈물 많은 세상에서 위로받고 싶고 그저 쉬고 싶어서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도는 교회를 그런 목적으로 다니는 곳이 아니다. 물론 성도는 교회에서 위로와 쉼과 평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복음과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주인이 바뀐 사람이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꿈꾸고 기도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서 살았지만, 이제 주님이 꿈꾸고 기도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성도는 이런 영혼의 변화와 가치관의 혁명을 겪은 사람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신을 더 있어 보이게 하는 장신구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의 장신구를 제거하게 하고 믿음의 옷을 입게 한다.

성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성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 같다.

영화 예수의 생애
▲영화 <예수의 생애> 한 장면. ⓒ모팩(MOPAC) 제공
이렇게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본질을 잃은 것 같다. 주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이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길거리에 종이조각을 줍는 할머니가 들어오기에는 너무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천사들이 잠시 들어와 깨끗하게 씻고 밥이라도 먹고 쉬고 갈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 사회가 그 정도로 무서워졌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교회도 그렇게 변질됐다.

이 모든 것에 변화를 주고 성도를 깨울 수 있는 것은 목회자로부터 시작된다. 필자에겐 다른 것보다 그것이 큰 찔림이었고 무거운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목회자이고 성도지만 쪼달려 살고 싶지 않고, 의도적으로 낮아지고 희생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돈도 많이 벌어서 잘 쓰고 싶고, 이왕 예수 믿은 거 멋있게 믿고 싶고 넉넉하고 여유있게 살고 싶다.

목회자지만 나에게 속물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자본주의에 잘 적응된 모습을 본다. 좀 더 큰 차 타고 싶고 좀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

내가 행복해야 남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고 내가 있어야 남에게도 베풀 수 있으니, 내 것을 먼저 채워야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맡고 있는 사역도 도전하기보다, 부교역자니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지금 수준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가 이러니 설교도 영적 능력과 감화가 희미하고, 기도도 무기력하다. 교회에도 선한 은혜와 진리의 통로가 되기보다, 있어도 없어도 되는 정도의 사람이다.

섬기는 부서에서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영적 도전을 주지 못하고 있다. 목회자가 이러니 변화와 회복과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다. 세속적인 목회는 이런 것이라는 가리고 싶은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책에서 나오는 처음 변화는 목회자이고 그의 설교다. 헨리 맥스웰은 주옥같은 표현과 세련된 문장으로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난 뒤, 그의 설교는 평범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깨우고 듣는 이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게 하는 설교였다.

신학이 탁월하고 언어가 세련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목회자가 이렇게 먼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제자로 살게 되니, 설교가 주님의 말씀이 되고 기도가 신령한 언어가 된다.

그러니 교회가 주님의 임재하셔서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보여주는 곳이 되고, 성도는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제자로 살기로 다짐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목회자로서 주님처럼 살려고 하기보다 그냥 목회자로 사는 것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는가?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힘들어도 생명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며 좁은 길 가기를 힘쓰기보다, 자본주의에 물들어 편하게 넓은 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성도로서 주님의 흔적이 없는 것에 아파하기보다, 나의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하고 결단하면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데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책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원하는 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고, 교회가 어떻게 부흥하는지 은혜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내가 먼저 주님으로 인해 변화를 노래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기적이고 고집스런 우리를 보게 된다. 왜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그대로인지 돌아보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맞게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가 될 때 주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예수의 흔적이 새겨지게 된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