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sunset 일몰 해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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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3장 1-18절


탁월한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일에 탁월함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일을 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편안함을 느낍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은 고음처리를 할 때도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부릅니다. 수준급 미용사들은 손쉽게 머리를 손질하는 것 같은데, 멋있는 스타일을 만듭니다. 힘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쉽게 써내려 갑니다. 잘 쓴 글은 독자들이 쉽게 읽어 내려갑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 역시 힘들이지 않고 말이 술술 흘러나옵니다. 청중은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이든 글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

‘성찰’이라는 책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세상에는 나이가 먹어도 하수도 있고 나이가 어려도 고수가 있다. 하수는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뽐내기 원하지만, 고수는 자신의 내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상대가 고수인지의 여부를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고수이다.

하수는 고수와 하수를 분간 못하지만, 고수는 고수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하수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고수는 마음속을 볼 줄 안다. 아직도 키와 외모를 따지면, 여전히 하수다. 고수는 언제 어디서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 최강 고수는 화난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장사의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이렇게 써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장사는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객에게 이득이 되는 상품인지 손실을 불러오는 상품인지를 생각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나에게 득이 된다 해서 일방적으로 판매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객에게 득이 되는 판매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득이 되고, 고객에게 손실이 되는 판매는 반드시 우리에게도 피해를 불러 오기 때문이다. 장사의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수는 그냥 고수가 아닙니다. 하수는 그냥 하수가 아닙니다.

목회 고수 옥한흠

<제자 옥한흠>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의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고(故) 옥한흠목사님에 대해 다큐멘터리식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솔직히 저는 옥 목사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을 시작하신 분이고, 사랑의교회라는 대형교회를 이루신 목사님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옥 목사님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소리 죽여 많이 울었습니다. 목사님이 사셨던 삶과 저의 삶을 비교해 보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옥 목사님은 주일 낮 설교를 위해 30시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셨다고 합니다. 장례식때 옥 목사님 사모님을 비롯한 자녀들이 영정 사진 앞에서 가족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둘째 아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옥 목사님이 설교 준비하시고, 교회 사역 하신다고 너무나 바쁘셔서, 가족사진 하나 찍을 시간이 없어 영정사진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부분이 감동이 됐지만, 옥 목사님이 진정한 목회 고수라는 것을 영화에 나오시는 반 목사님이라는 분의 간증을 듣고 느꼈습니다.

반 목사님은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해서 사례비도 없이 주로 아이들에게 제자훈련을 시키고 가르치신 목사님이십니다. 한 번은 옥 목사님이 이 반 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반 목사, 나는 반목사가 너무 부러워. 반 목사는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목회하니까 하늘의 상급이 클거야. 그런데 나는 하나님 앞에 가면 상급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이 땅에는 나는 너무나 대접을 많이 받은 것 같아. 힘들지만 잘 견디어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거야,”

옥 목사님은 진정한 목회의 고수였습니다. 그분은 비록 대형교회 목사님이셨지만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한 사람을 제자삼기위해 미치신 광인이셨습니다.

옥한흠
▲지난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하는 옥한흠 목사. ⓒ크투 DB
옥 목사님께서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감사예배 때,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설교를 마치고 하신 마지막 기도가 잊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주여 이 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주여, 이것이 감히 설교할 자격이 없는데도 주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미천한 것을 몰아붙이셨습니다.

아버지, 겉모양은 요란하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 있는 이 한국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해 주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게 하시고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영광이 이 땅에서 경배를 받으시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제가 옥 목사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목회의 고수가 될 수 있도록 애써보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고수다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당시 사래) 때문이었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그녀를 취하려 하다, 하나님께 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겁이 난 바로가 사래를 돌려보내게 되는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아브라함은 큰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 일행은 전에 장막을 쳤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애굽에서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니, 아브라함에게도 가축과 소유가 많고 조카 롯에게도 가축과 소유가 많아 그 땅에서 함께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롯을 불러 이야기를 합니다.

“너와 나는 친족인데 목자들이 서로 다투어서야 되겠느냐 네 앞에 땅이 펼쳐져 있으니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떠나가라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겠다.”

아브라함의 제안을 들은 롯은 금싸라기 땅을 선택합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을 해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롯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삼촌인 아브라함이 거두어주고 키워주었습니다. 롯의 재산이 불어난 것도 결국 누구 때문입니까?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런 제안을 했을 때, 롯은 당연히 삼촌이 먼저 선택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롯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삼촌이라는 위치도 있었고 힘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기꺼이 모든 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눈에도 여호와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보이지만 아브라함은 양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고수였기 때문입니다. 고수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 주장을 펼쳐 나가지 않습니다. 고수는 넉넉한 가슴이 있습니다.

고수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합니다.

힘을 자랑하지 않는 다는 것은 힘을 뺀다는 것이다

고수가 힘을 자랑하지 않다는 것은 힘을 뺀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악가는 목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손목에 힘을 뺍니다.

제가 운동 중에서 제일 잘하는 것이 탁구입니다. 탁구를 잘 치려 해도 어깨에 힘을 빼야 합니다. 손에도 힘을 빼야 합니다.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힘이 들어가는 순간 경직이 됩니다. 힘을 주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빚어집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부자연스러워집니다. 긴장한다는 것은 힘이 들어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감독이나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왜 인간관계에 마찰이 일어나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관계에 마찰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의지를 꺾지 않고 힘으로 들이밀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사람들은 대부분 힘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협상의 귀재들도 처음부터 날 세워 자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기를 꺾고자 무모하게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함으로, 스스로 무장해제하게 만듭니다. 부드러움이야말로 힘을 무력화하는 또 다른 힘입니다. 하수일수록 힘을 많이 쓰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초보들은 항상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초보운전자들을 보십시오. 특별히 여성 운전자들은 있는 힘껏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 있습니다. 긴장을 해서 그렇습니다. 긴장을 하니까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손에 힘을 주어 운전을 하면,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베스트 드라이버들은 힘을 빼고 아주 여유 있게 합니다. 여유롭게 한 손으로도 운전을 합니다.

고수의 힘은 숨어 있다

고수는 힘을 자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고수의 힘은 숨어 있습니다. 상대가 그 힘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가끔 힘을 쓸 일이 있을 때도 철저히 절제의 미로 단장합니다.

힘을 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힘을 절제하는 것은 고난도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고수가 힘을 뺀 순간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자기 기량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상태입니다.

힘만 쓰려 하는 사람들은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힘을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가진 힘이 무엇이든, 그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힘을 가질수록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릅니다.

힘을 가지려고 혈안이 된 세상에서 힘을 빼는 훈련을 함께 배우지 않는다면, 힘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힘을 뺄 줄 아는 사람, 고도의 자기절제가 있는 사람, 끝없는 자기포기가 되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힘이 들어가 있다면, 나는 아직 하수입니다. 고수가 되기 위한 첫 출발은 나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내 수준이 어떤 수준인지 알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고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수는 천재가 아닙니다. 고수는 천재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천재는 타고난 재능과 실력을 가질 수 있지만 고수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만화계의 고수 이현세 선생

만화계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이현세 선생님이 ‘천재와 싸워 이기는 방법’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추월할 수 없는 천재를 만난다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어릴 때 동네에서 그림에 대한 신동이 되고, 학교에서 만화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만화계에 입문해서 동료들을 만났을 때, 내 재능은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중에 한두 명의 천재를 만났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매일매일 날밤을 새우다시피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내 작업실은 이층 다락방이었고 매일 두부장수 아저씨의 종소리가 들리면 남들이 잠자는 시간만큼 나는 더 살았다는 만족감으로 그제서야 쌓인 원고지를 안고 잠들곤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한 달 내내 술만 마시고 있다가도 며칠 휘갈겨서 가져오는 원고로 내 원고를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타고난 재능에 대해 원망도 해 보고 이를 악물고 그 친구와 경쟁도 해 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상처만 커져갔다.

만화에 대한 흥미가 없어지고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점점 멀어졌다. 내게도 주눅이 들고 상처 입은 마음으로 현실과 타협해 사회로 나가야 될 시간이 왔다. 그러나 나는 만화에 미쳐 있었다.

새 학기가 열리면 이 천재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꼭 강의한다. 그것은 천재들과 절대로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재를 만나면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면 상처 입을 필요가 없다.

작가의 길은 장거리 마라톤이지,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천재들은 항상 먼저 가기 마련이고, 먼저 가서 뒤돌아보면 세상살이가 시시한 법이고, 그리고 어느 날 신의 벽을 만나 버린다.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신의 벽을 만나면 천재는 좌절하고 방황하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종내는 할 일을 잃고 멈춰서 버린다.

이처럼 천재를 먼저 보내놓고, 10년이든 20년이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멈춰버린 그 천재를 추월해 지나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긴긴 세월에 걸쳐 하는 장거리 승부이지, 절대로 단거리 승부가 아니다. 만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매일매일 스케치북을 들고 10장의 크로키를 하면 된다. 1년이면 3,500장을 그리게 되고 10년이면 3만 5,000장의 포즈를 잡게 된다.

그 속에는 온갖 인간의 자세와 패션과 풍경이 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그려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 만화가 이두호 선생은 항상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이 말은 언제나 내게 감동을 준다.

평생을 작가로서 생활하려면 지치지 않는 집중력과 지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잠들기 전에 한 장의 그림만 더 그리면 된다. 해 지기 전에 딱 한 걸음만 더 걷다 보면, 어느 날 내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현세 선생님은 천재를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되는 비결은 집중력과 지구력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수없이 훈련하고 반복하는 사람이 고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슛은 킥이 아니라 터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경기 중 하나가 축구경기입니다. 온 세계는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축구에 환호합니다. 축구의 승패는 골을 얼마나 많이 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골을 넣기 위해는 슛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슛에 대한 너무 강한 의욕이 화를 불러들일 때가 많습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인 올레 군나르 솔샤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한 번은 박지성 선수에게 이렇게 훈수했다고 합니다. “슛은 킥이 아니라 터치다.”

슛은 내 힘으로 차 넣는 것이 아니라, 공이 찾아오는 순간을 포착하여 발을 갖다 대는 순발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요행이 아니라, 수없는 리듬 터치를 통한 감각이 쌓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킥은 힘을 주는 것이고, 터치는 힘을 빼는 것입니다. 힘을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을 빼는 것은 고수들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하나님께서 어시스트해 주시는 볼에 터치해야 합니다.

고수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롯을 떠난 보낸 후 찾아오셨습니다. 아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보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는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수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에게 주목하고 환경에 주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은 힘을 빼고 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힘을 빼고 하나님께 주목하는 고수를 주목하십니다. 주목하실 뿐 아니라 마음껏 축복해 주십니다.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고수다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군인들을 데리고 검과 몽치로 예수님을 잡으려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칼을 빼들었습니다.

베드로는 힘으로 승부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서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그들에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수이셨기에, 때문에 힘을 빼고 그냥 끌려가 주신 것입니다.

하수인 사단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영적 고수가 되는 길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무엇보다도 영적 고수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고수가 되려면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 하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께서는 목회 사역에 성공하고자 하는 목회후보생이나 목회자들에게 단연코 “예수님을 잘 믿으십시오” 이렇게 권해드린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목회에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목회 성공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사님은 진짜 예수님을 믿는지, ‘예수님을 정말 제대로 믿어본 적 있었습니까?’라고 반문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 보다 큰 일도 하니리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자신이 하는 일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카더라’ 통신을 너무나 잘 믿습니다. ‘누가 누가 카더라’ 하면 확인도 해보지 않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을 그렇게 믿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을수록, 우리는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고수가 되지 않으라고 해도 고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점은 바로 ‘임계점’이다. 물은 99도에서 끓지 않고 100도에 끓는다. 하찮은 1도 차이에서 고수와 하수는 결정된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겨우 1도인 것 같지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