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 투신자살 시도
1. 코로나19는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위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기침만 해도 대상이 달리 보입니다.

저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뉴스에 나타나기 전, 설 연휴에 <남산의 부장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나와 그분이 뭐가 다른가 싶었습니다.

똑같이 영화를 본 것인데, 코로나19에 감염됐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그 분과 그 지역 자체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이 나일 수도 있었을텐데, 싶었습니다.

코로나19가 위험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지요. 첫째로 잠복기가 있어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 둘째로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전염성이라는 것은 이동 경로가 어디인지도 알아야 하고, 발병 당사자도 누군가에게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니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2. 그런데,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알아보기 힘들고, 마음은 누군가에게 전이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참 놀라운 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명사와 여러 가지 동사를 붙이면 모든 말이 다 되거든요.

‘마음먹다, 마음을 그리다, 마음대로 산다, 마음을 주다·얻다, 마음 쓰다’.

‘내 마음 믿어’, ‘내 마음 알지?’, ‘니 맘 다 알아’.

그러니까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는 너무 중요합니다.

3.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그 마음을 먹는답니다. 기가 막힙니다.

마음이 매번 변하면서 마음을 준답니다. 도대체 뭘 주는 걸까요.

마음을 달랍니다. 사실은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니 맘 다 안답니다. 아는 건 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겠지요

내 마음 알지? 왜 타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마음을 물을까요.

4. 성경은 마음과 관련해, 딱 하나의 동사를 제시합니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장 23-24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성경은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에서 생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모호함은 구체화시키지 않으면, 그 모호함에 속아 구체적인 자기 삶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호한 단어일수록 구체화시키고 자기 삶에 스며들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네게 보여줄 그 땅으로 가라” 명령하실 때, 미래에 보여줄 그 땅을 오늘을 살아감으로 구현했습니다.

마음은 지혜롭게 행동하는 자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지혜롭게 행동하는 자는 먼 미래에 내가 준비하고 나서 행동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오늘을 결단하고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마음을 지킬수 있습니다.

6.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너한테 이 땅 줄거야” 말씀하는데도, 땅에 눈 먼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마음이 언제 흔들렸나요? 아주 심플했습니다.

7. 창세기 12장, 믿음의 여정을 떠나기로 결단한 바로 그 장에 10절에 가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잠깐 자신의 삶이 어려워지니, 하나님과 약속도 잊고 애굽이라는 화려한 나라로 발걸음을 돌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으로 귀향하고 만 것입니다.

실제로 ‘거류하려고’라는 말은 그 아브람의 마음 속에 있었던 생각을 하나님이 읽으셨다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가나안에서 이제 버티고 살자. 그 곳에서 하나님 약속을 기다리자 했던 아브람이 다시 식구들을 설득해 ‘우리 기근을 피해 잠시만 애굽에 거하자’고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애굽에서 살 생각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전의 아브람이 마음을 지켰을 때는 너무 좋은 땅 하란을 버린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가나안을 향해 갔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조금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8. 아브람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장은 계속해서 믿음의 장이 아니라, 얼마나 아브람의 내면에 어둠이 많은지를 드러냅니다.

애굽으로 간다면 마음이 편해야겠지요? 가족들과 함께 살 생각으로 애굽에 갔으니, 더욱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생겨야겠지요? 그런데 마음에 불안이 생긴 겁니다.

문득 옆에 있던 사라한테 말하기를 “당신은 너무 예뻐”라고 합니다. 사랑의 고백일까요? 아닙니다.

“당신이 너무 예쁘니까 누이라고 속여야 해.” 그 고백은 사라를 위한 고백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1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발 부탁인데 당신이 내 누이라고 해줘. 그래야 내가 살아요!” 마음을 지키지 못하니까, 존재는 소유의 대상일 뿐입니다.

여러분, 왜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치는 줄 아세요? 소명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처음 가나안에 왔을 때의 마음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려는 순간, 모든 것과 모든 관계가 깨어집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던져지는 거짓 사랑의 고백에 속아,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은 여러분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소유함이 될 수 있습니다.

9. 물론 성경은 아브람이 회복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위기에서 다시 회복되는지 알아야 소망이 있으니까요.

13장에 가면, 롯의 하인과 아브람의 하인이 비좁은 땅 때문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람이 회복된 상태가 되자 롯에게 가서 말하기를 “네가 먼저 땅 선택해. 나는 나머지 선택해도 돼”라고 했습니다.

어떤 소유보다도 그 한 존재가 더 사랑스러운 것이지요. 이것은 그의 마음이 회복됐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워,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 걸어가봐. 땅 다 줄게. 너 눈들어 보이는 것 다 줄게”라고 말하십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땅은, 헤브론 산지 험한 곳입니다. 그곳에 올라가 예배드립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니 그냥 우리 마음에 대단히 위대한 선언입니다.

“나는 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죽기 직전 사라의 무덤을 헤브론으로 달라고 합니다. 이 고백을 잊지 않기 위해, 신앙의 유산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 외에 땅 한평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브람의 삶이었습니다.

10. 문제는 이 상태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5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밤에 불러내 말씀해주십니다. “나는 네 방패,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야. 나는 네 자손들 번창하게 해줄거야.”

그런데 아브람의 마음이 삐쭉해져 있었습니다. “저한테 뭘 줄건데요? 저 자식 없잖아요.” 삐져 있습니다. 서운한 겁니다.

여러분, 모든 말에 자기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거야.”

11. 그런데 16장에 가면 아브람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라의 말에 속아, 결국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보다 앞서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17장에 가서 하나님은 그것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사래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아브람은 17절에 이렇게 자기 마음을 드러냅니다.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웃기고 있네.”

그러면서 겉으로는 공손히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 아니에요 그냥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잘 살면 됩니다.”

겉으로는 공손해보이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이 가득한 이중적인 마음을 하나님은 읽으셨습니다.

12. 결국 아브람의 그 마음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놀랍게도 20장에서 그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랄에 가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고 마는 겁니다. 오히려 이때는 자기합리화까지 더해졌습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같은 잘못은 반복되고 더욱 강화되게 마련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마음이 변하는 자기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지식과 경험의 합산이 더해져 마음을 감추고 꼬아버리는 자기 합리화의 오류에 빠지고 말 거예요. 결국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기쁨이 사라지고 말겠지요.

13.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어내시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다시 회복되지요.

마지막으로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제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전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위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데도, 당황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바뀐다고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도, 마음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가장 험악해졌음에도 피하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삭을 살리시고,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은 바로 그 산에서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임을 알려줍니다.

14. 말이 길었지요. 코로나19로 여러 사람이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마음을 지키세요. 우리의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은, 상황이 바뀌어도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청년들마저 상황이 조금 바뀌면 마음이 순식간에 변합니다. 그리고 합리화해버립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자기 마음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누군가 자신에게 전염시키는지 이동 경로가 확보되지 않고, 내 마음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구 전염시키고 있음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소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라와 같은 말로 마음을 잃게 만드는 사람도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될수록, 소유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변한 자기 모습을 보기 싫어해, 합리화로 스스로를 변명해가는 아브라함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처음 마음은 무엇이었나요? 아시지요.

마음에는 어마어마한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가장 크고 가장 알아보기 힘든 심연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장난치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마음은 전염됩니다. 소유에 대한 마음으로 누군가가 여러분을 전염시키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니, 어쩌면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주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외침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전세계 곳곳에 코로나와 각종 질환으로 시달리시는 모든 환우 분들과,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주님의 치유하심의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샬롬.

류한승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미주 기독일보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