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면서 기도합니다. 기도한 것이 세 가지였는데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부자유한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눈이 밝은 사람이 되라!’에 초점을 맞춰 묵상하고자 합니다.

1.육신의 눈 주심을 고마워하라

육신의 눈은 우리 몸 중에 가장 중요한 정보통로입니다. 눈을 통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게 됩니다.

바야흐로 듣는다는 오디오(audio) 시대는 가고, 본다는 비디오(video)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가수는 일단 예뻐야 됩니다. 옛날에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만 잘 부르면 됐는데, 이제는 보기 좋아야 우선 한몫을 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눈 수술을 하느라 혈안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매력의 포인트가 눈이어서 그럴 것입니다. 얼굴 중에서도 눈이 차지하는 매력이 90%가 된다니, 그럴 만도 합니다.

눈이 중요하기 때문에 화장품에서더 눈 화장품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아이라인, 아이쇄도우 등 많은 종류의 눈에 관련된 화장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 이방 풍속에도 전쟁에 졌을 때 가장 굴욕적인 벌이 눈알을 뽑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사기 13장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힘의 비밀을 털어 놓아 블레셋인들에게 잡혔을 때 눈알을 뽑혔습니다. 그러니 그 힘센 장사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눈을 뽑아버리므로 그의 능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멸시키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눈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우리가 잊고 살아감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2. 정신의 눈이 더 중요하다


정신의 눈은 글을 깨닫는 지적인 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예술적인 심미안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이런 정신적인 눈을 밝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우리 속담도 정신적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즘 전남 곡성의 <시인 할매>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한글을 모르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것이 영화로 제작돼 상영 중입니다. 정신의 눈을 뜬 결과입니다.

저는 피카소 그림을 아무리 보아도 왜 아름다운지를 아직도 모릅니다. 예술적 심미안이 없어서입니다. 예술 작품은 심미안이 있어야 감상이 가능한 것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메리메리가 쓴 <카르멘>은 유명한 오페라입니다. 훗날 비제가 오페라로 작곡해 주인공 집시 여인 카르멘이 사내를 유혹하는 노래 ‘하바네라’와 ‘씩씩한 투우사의 합창’과 함께 더 유명해진 작품입니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남부 세빌리아 담배공장의 여직공 칼멘은 집시 여인이었습니다. 특유의 매혹적인 크고 검은 눈으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용병 상사 돈 호세 앞에 아카시아꽃을 던지며 유혹의 소프라노로 ‘하바네라’를 부릅니다.

이 야성적인 집시 여인에 반해버린 돈 호세는 멀리 시골에서 늙으신 어머니가 편지를 들려 면회를 보낸 약혼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카르멘에 푹 빠져 버립니다.

그런데 카르멘은 이 우직한 사내와 솔방울이 활활 타는 숲속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다시 인기 절정의 투우사 루카스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이때 돈 호세는 카르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제발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그러나 카르멘은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순간 돈 호세는 옆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카르멘을 두 번 ‘푹, 푹’ 찌릅니다. 비명조차 못 지르고 쓰러진 카르멘은 그 큰 눈으로 돈 호세를 쏘아보더니, 곧 그 크고 검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훗날 돈 호세는 카르멘의 그 크고 아름다운 검은 눈을 잊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칩니다. 그것은 매력적인 스페인의 눈이라는 ‘Spenish eye’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육신의 눈을 가졌어도, 정신의 눈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행복합니다. 정신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더 넓은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3. 영적인 눈이 밝아야 한다


18절에 “너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의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눈은 육신의 눈이나 정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육신의 눈이나 정신의 눈으로는 알 수 있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눈을 믿음의 눈이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가,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문제는 바로 믿음의 눈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눈이 밝은 사람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언제나 진단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밝은 사람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항상 진단합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 있는 사람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부자여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눈이 밝은 사람은 주님을 늘 바라보면서 늘 깨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했습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을 뜨지 못했지만, 신령한 눈은 그 누구보다도 더 밝았다고 했습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저와 여러분은 영적인 눈이 밝아서 하나님의 복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로 육신의 눈의 고마움을 알게 하소서. 정신의 눈이 더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영적인 눈이 더 밝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적인 눈이 밝기를 노력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