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역설한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칭의론이 종교개혁을 완성할 복음이라고 한다.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을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의의 열매와 관련시켜 소개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한 말을 언론사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김세윤은 500년 전에 외쳤던 마르틴 루터의 의문을 떠올린다. “기독인이 어느 정도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김세윤에 따르면 믿음만으로는 의롭다는 칭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과 함께 의의 열매를 맺어야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면서 외친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은혜(sola gratia)’는, 김세윤에게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1. 새 관점

김세윤이 저술한 <칭의와 성화(서울: 두란노서원, 2013)>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울의 칭의론은 윤리적 가르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제한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자 샌더스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의 유대교를 연구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다.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그들의 선택을 지탱시키셨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 순종하면 상 또는 복을, 불순종하면 벌을 주신다. 율법은 속죄의 수단들이다. 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회복시켜 준다. 율법에 대한 순종, 속죄, 또는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샌더스가 제시한 위 명제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는 종교”이다. 유대교는 은혜언약이 율법 준수를 요구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했다고 한다. 바울은 배타주의 구원론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자, 독자적 칭의론을 전개하면서 유대교를 비방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인 유대교를 의도적으로 ‘율법주의적 공로 종교’로 왜곡시킨 결과라고 한다.

바울연구가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론을 이방선교의 맥락에서, 이방인들의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동기와 선교라는 차원에서 전개한 구원 교리라고 본다. 이들의 새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어났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고 있고,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유대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유대인들을 환대하려는 시대정신의 결과이다.

김세윤은 위 새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거 기저에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축소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위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위 현대 학자들의 노력으로 유대교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칭의와 성화, 곧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한다.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에 집착한 탓으로 법정적 의미를 무시한다. 동시에 전통적 칭의론은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김세윤은 이 두 관점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톰 라이트의 통합 방식에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는다. 칭의를 의인이 되었다는 법정적·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71-72, 74, 81).

2.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에게 칭의는 무죄선언, 곧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슈바이처가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에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칭의론만 붙든 탓이라고 본다. 전통적 구원론은 칭의의 현재적 의미를 망각하고, 윤리 또는 의로운 삶을 무시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김세윤은 이러한 구도에서 칭의가 종말의 때까지 유보되었다고 강조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뜻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관계, 곧 순종 안에 있기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 성화는 하나님께 바쳐지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 현재 단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핵심 전제는 예수 믿는 자,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라도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칭의의 현재 요소는 성화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답지 않거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탈락한다. 과거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롬 10:9-10), 종말의 칭의 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주장한다(칭의와 성화, 192, 264).

김세윤의 신학에는 성령의 내주동행 역사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의 믿음을 끝까지 구원받는 단계까지 유지시켜 주신다는 진리를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세윤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지 받지 못할지 알 수 없다. 심판대에 설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유보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시민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선한 행위를 가진 자만 구원받을 수 있다. 믿음만가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수반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점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칭의가 단번에 이루어짐을 무시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으로 본다(칭의와 성화, 177).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열매, 곧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던 구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칭의를 구원에 합당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김세윤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 구도와 불일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은혜’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개인의 성화나 공덕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른다.

▲최근 방한한 김세윤 교수(오른쪽)가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3. 나무와 열매

전통적 구원론, 칭의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죄 용서받음과 더불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때 기독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에 진입하고, 천국 시민이 된다. 예수 믿는 자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된다. 천국 시민권은 믿을 때 받는다. 시민은 국가의 호적부에 이름이 등재된 자이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한다.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 칭의는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미래의 죄들을 용서받을 법적 근거이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엡 2:1-10). 믿을 그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시 103:12).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진정한 기독인은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법적·단회적 사건이다.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뜻한다.

성화는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칭한 자를 동시에 성화로 인도하신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인은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4. 질문

김세윤에게 묻고 싶다. 첫째, 비기독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여 개종·회심하도록 인도해 본 적이 있는가? 복음을 제시하여 몇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했는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 회심자·개종자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구원을 받을지 받지 못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습니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예수 믿는 자, 곧 기독인이 어느 정도의 의의 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의 의의 열매나 선행이나 윤리의 실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셋째, 김세윤이 말하는 칭의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성화 곧 윤리적 행위인가? 선행 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 아닌가?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이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 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는 현재완료형 사건이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는 자 가운데 의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원받는 참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칭의를 선물로 받지 못한 탓이다. 심리적 현상, 분위기 탓, 망상, 오해, 마귀의 궤계, 환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수 믿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김세윤이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지난 500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수로 존중되어 왔다. “율법에 부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강조해 왔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이 가져온 신앙의 왜곡’에 대한 거친 반발, 지나친 반발이었다”고 한다. 의의 열매, 곧 선한 행위를 가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신의 칭의론으로 종교개혁신학을 완성해야 한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교인들을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무율법적인 혼란을 야기하므로, 우리 시대의 칭의론은 종교개혁 시대의 칭의론과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에 행함이 부족한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칭의를 인간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김세윤의 주장은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성화의 결여나 결핍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칭의 진리를 뒤바꾸면,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 되고 만다.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1장 1조와 벨직신앙고백서 제2조에 표현된 전통적 칭의 교리를 강하게 외치는 곳마다 교회가 생명력 있게 왕성해지고 성장하고 부흥했다. 칭의 교리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대속 진리, 은혜의 복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윤리적 결함은 칭의 교리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진리와 전통적 칭의론을 확실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우리를 구원한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지, 우리가 맺은 의의 열매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은, 인간의 율법 준수와 행위 때문이 아니다.

5. 나의 신앙고백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빌 2:12)”라고 말한다.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다투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다(빌 2:14-15).

야고보서는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약 2:14, 17, 26)?”라고 한다.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 촉구 맥락의 메시지이다(약 2:15-16). 열매 없이 살아가는 믿는 자들의 실천을 강조한 말씀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어려 면에서 유감스럽다. 기독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없이 생기 없이 열정 없이 살아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복음 전도자의 열정을 앗아간다. 교회 부흥의 동력을 축소시킨다. 성령의 사역인 성도의 견인 진리를 팽개친다.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해석하려고 한다. 윤리와 실천을 구원과 칭의의 열쇠로 보는 그릇된 확신을 확대시킨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유보적 칭의론을 거부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5:1)”고 선언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엡 2:1, 5)”고 한다.

나의 신앙을 짧게 고백하고 싶다. 나는 의롭다고 칭함받은 죄인이다. 의인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숨을 거두어도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확신한다. 내가 맺은 의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전가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 때문이다. 나는 의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들, 나의 의, 의의 열매, 선행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는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사역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심판 날까지 굳건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단절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게 구원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글이 김세윤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기 바란다. 소모적인 논쟁·논의는 사양한다.

최덕성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이며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 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 충돌>, <교황 신드롬>,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