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는 “오늘이 올해 마지막 강좌인데, 무슨 선물을 드릴까 하다 수술 후 동영상이나 어떤 사진에서도 발표하지 않았던 제 머리 모습을 드러낸다”며 “사실 이제까지 보신 까만 머리는 염색한 것이다. 진실이 뭔지, 가깝다는 게 뭔지는 약점이나 숨겨왔던 것을 드러내면서부터, 베일을 벗기면서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된 소설 <파이 이야기>를 주제로, 올해 마지막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 ‘소설로 읽는 영성순례’를 진행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에서 11월 28일 오후 열린 강좌에서 이어령 박사는 소설을 통해 과학과 문학, 숫자와 언어, 종교까지 꿰뚫는 ‘사랑과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뽑아냈다. 이는 그가 최근 주창하고 있는 ‘생명자본주의(바이오필리아·生命愛)’와 일맥상통한다.

이안 감독에 의해 3D영화로 재탄생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에서는, 힌두교를 믿던 한 인도 소년이 기독교와 이슬람 등 다른 종교들도 받아들인다. 이후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 퐁디셰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소년의 집안은 정치적 혼란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배가 파선하면서, 소년이 구명보트에서 227일간 ‘리차드 파커’라는 벵골 호랑이와 공존하는 과정을 담았다.

무리수 ‘파이’ 같은 신비한 세계, 여기서 생명주의 나와

이어령 박사는 주인공 이름인 ‘파이’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파이’의 원래 이름은 ‘피싱’이었다. 하지만 ‘소변’이라는 뜻 때문에 자신이 ‘파이’로 바꿨다. 이는 원주율(π)을 뜻하는데, 이에 대해 “영원히 끝이 풀리지 않고 계속되는 무리수(無理數)로, 결국 피타고라스가 그러했듯 자연과 지구를 숫자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이라며 “이 무리수 같은 신비한 세계처럼, 파이가 벵갈 호랑이와 대결하면서도 구명보트에 단 둘이서 227일간 살아간다는 뜻으로 여기서 생명주의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령 박사는 “<파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데서 알 수 있듯 기법이나 구조 등이 정말 아마추어적이고 딱 보면 ‘소설 쓸 줄 모르는구나’ 생각이 들지만, 언어를 통한 감동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며 “좋은 영화는, 정말 슬픈 이야기는 눈이 따가운 게 아니라 어금니 쪽이 뻐근한 법”이라고 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파이 이야기> 주인공이 여러 종교를 모두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원주의나 범신론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예수님 앞에서 여러 신을 믿은 게 잘못이라는 걸 따지기보다 우리가 이 아이처럼 예수님을 간절하게 사랑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자”며 “우리는 기독교 하나만 믿으면서도 파이처럼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전인격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되물었다.

이 박사는 “이 세상의 어떤 말도 딱 그 한 마디로 침묵하게 하면, 절대 언어가 지배되는 것은 바로 폭력”이라며 “가룟 유다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없었고, 물론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지만 사탄이라는 개념 없이 하나님이라는 언어만 지배했다면 오늘날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종교의 경전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다

그는 “하지만 <파이 이야기>에서 보듯 생명이라는 곳에 들어가면 가장 큰 원수까지도,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지만 그 절대적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파이와 벵갈 호랑이는 그 황량한 바다에서 227일을 버틸 수 있었다”며 “그래서 폭풍이 몰아쳐 호랑이가 바다에 빠진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파이가 그를 건져주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부활과 다를 바 없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어느 종교 경전에 원수를 사랑하는 말이 있느냐”며 “그런 의미에서 파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인간은 생명과 눈이 마주치면, 그가 짐승일지라도 생명의 부딪침이 있을 때 반드시 원수라도 사랑하게 돼 있다”며 “생명은 먹고 먹히는 가운데 기가 막힌 사랑이 생겨나는데, 이 사랑이 인간을 벗어나 모든 생명으로까지 깊이 확산되는 것이 원래 기독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령 박사는 “기독교인들은 ‘All or Nothing’의 생각으로 늘 죄의식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도 ‘빵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라’가 아니라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셨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다”며 “‘돈이나 믿음이냐’는 무엇을 우선하느냐의 문제일 뿐, 극단적인 ‘All or Nothing’으로 가는 것은 삶에 열광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 박사는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 가운데 생겨나는지 남자들은 모른다”며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는데, 그 아픔이 바로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부활은, 생명은 반드시 추운 겨울과 피와 고통을 겪어야 나타난다는 것. 인간은 먹으려고 하지만, 먹히려고 하는 것, 즉 이 희생이 바로 기독교 아니냐고도 했다. 그는 “제가 무신론자였을 때는 하나님은 짓궂게 왜 추운 겨울을 주셨냐고 얘기했지만, 하나님께서 겨울을, 밤을 주시지 않았다면 탐욕스러운 인간은 휴식 없이 24시간 동안 노동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생명은 사랑이 싹틀 때 사탄·죽음보다 강해져

그런데도 생명은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하지 않다. 이 박사는 “극한 상황에서 227일 동안이나 서로 의지했지만, 끝없는 생명에의 목마름과 고통,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런 것들이 바로 신앙이 되고 현실이 될 때 우리 삶이 지속될 수 있다”며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가 물에 빠졌고 가만 두면 자신은 해방되지만, 결국 호랑이가 그 때 빠져 죽었으면 인간도 결국 죽게 되는데, 이게 바로 원수와의 관계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사랑이 싹틀 때 사탄보다, 죽음보다 강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생명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닮은 형상으로 만드셔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이는 모두 잡아먹으라는 게 아니라 비록 짐승일지라도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며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 말씀을 저는 좋아한다. 생명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끼리만의 사랑이 아니라 자연까지 사랑한다면 오늘날처럼 마구잡이 환경 파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바이오필리아’, 깊은 생명의 교감을 갖고 태어난다”며 “인간이 나무나 돌은 먹지 못하지만 짐승을 잡아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둘이 어떤 의미에서 같은 생명이어서 우리 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부조리한 신비함 속에 영원히 생명은 지속된다

▲강연 후 기념촬영 모습. 이날 강좌에는 수술 후 회복 중인 이재철 목사도 참석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 박사는 “산불이 나면 생명이 없어지지만 천적이 사라진 딱정벌레는 거기서 비로소 알을 낳을 수 있듯, 펭귄이 가장 추운 북극으로 들어가서야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듯, 한쪽의 불행이 행복이 되고 추위가 따뜻함이 되고 먹는 것이 먹히게 되는, 부조리해 보이지만 영원히 숫자로 풀 수 없는 무리수(파이) 같은 신비함 속에 영원히 생명은 지속된다”며 “이 모든 것들이 피싱이라는 모멸적 이름에서 가장 생명에 가까워진 파이에 의해 다가서게 되고, 이것이 소설과 영화가 주는 감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파이가 호랑이를 살리는 그 부조리한 행동이 바로 성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보셨나”며 “위선인 것 같았지만 정말 생명을 알면 원수까지라도 살려준다는 것을 도덕과 윤리가 없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저 생명이 바로 사랑이고 십자가의 보혈임을 느끼셨다면 생명자본주의와 <파이 이야기>, 지난달 말한 <탕자, 돌아오다>의 접점을 찾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