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하고 있는 이동주 교수. ⓒ이대웅 기자

7일 열린 2013 한국신학회(회장 정상운 박사) 공동학술대회 ‘한국교회, 미래는 있는가?- 2013 WCC 부산총회 개최 그 이후’ 3부 논문발표회에서 이동주 교수(아신대 은퇴)가 발표한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을 두 차례에 나눠 게재한다.-편집자 주

서언

‘한국 사회와 교회의 나아갈 길’이라는 부제목은 필자에게 너무 큰 테마이므로 필자는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에 관해서만 연구하고자 한다. WCC 부산 총회 개최 이후 일부 한국교회의 신앙은 급속도로 성경적 신앙을 떠나 세속화되고, 혼미해질 것이다. WCC는 1960년대 이래 이미 반 세기 넘도록 점진적으로 종적 시각을 상실해 왔기 때문이다. 부산 총회는 일부의 한국 복음주의 단체들과 한국의 상징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까지 WCC와 손을 잡고 거대한 후원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교회 사역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따르는 한국 신도들은 무비판적으로 WCC의 신앙과 신학적 흐름을 탈 것이다.

WCC 이후로는 성경적인 구원을 상실한 WCC의 뒤틀린 복음과 신학으로 인해 개종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점차 교회에 성경적인 회개운동과 새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성령의 역사 역시 감소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한국교회와 한국에 임할 수도 있다.

한국교회는 에스겔 22장 30-31절 말씀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하나님 율법을 범하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않은 죄 등으로 “하나님을 더럽혔을 때(profaned)”,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막아설 사람을 찾지 못함으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도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북한과 북한교회가 망한 것을 우연한 일로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복음적인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WCC의 정체를 잘 파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도록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잘 구별하여 가르치고, 1960년대부터 WCC가 지지해 온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세속주의, 이중 고백적인 가면과 속임에 순박하게 따라가지 않도록 근신하고 성경적인 복음을 잘 지키고 또 전파해야 할 것이다(갈 1:6-9).

한국교회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해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복음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기 위해, 개인의 이익 때문에 분리 분열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찢는 교회의 분열에 대해 회개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산 총회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과 다른 그리스도들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이전보다 분열의 상처가 더 아플 것이라 예상되는 점이다. 그 양상은 종교다원주의나 반개종주의 같은 속된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 성경적 그리스도인들과, 세계평화공존이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우선인 방법이라 보고 ‘가시적 교회연합 운동’과 ‘인류연합 운동’을 위해 성경도 신앙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세속적 그리스도인들로 더 확실하게 나뉠 것이다. 결국 WCC 부산총회 이후 한국교회 연합운동은 세속적 연합운동과 성경적 연합운동으로 더욱 분열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WCC 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의 뜨거운 이슈가 된 종교다원주의 선언문을 밝히 알 수 있도록, WCC의 공식선언문인 ‘바아르 선언문’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옮겨 적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연합은 어떤 것이고 기뻐하시는 연합이란 어떤 것인가를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교회분열 문제로 생명을 걸고 고민한 존 웨슬리의 선교신학을 고찰해 본다.

1. 바아르 선언문

우리는 1990년 정초 스위스 바아르(Baar)에서 WCC, 정교회, 가톨릭교회가 함께 논의하고 이끌어낸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을 주목하게 된다. 이 선언문은 여러 명의 로마가톨릭 신학자들, 주교들, 사제들, 신학자들과 특히 종교다원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미국의 종교신학자 폴 니터(Paul Knitter) 교수가 가담하여 작성한 WCC 공식문서이다. 이 선언문은 타종교들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 내지 ‘성령’이 활동한다는 것과 타종교들 속에 있는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현재가 온 인류에, 성령이 온 인류에, 하나님의 구원이 온 인류에 현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기독교인들이 수행할 과제를 제시하는 선언문이다:

종교다원성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이해는, 태초부터 만물 가운데 현존하여 활동하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에서 출발한다. …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 가운데 임재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해 왔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고유한 방식으로 증언해 오고 있다. … 우리 그리스도인의 증언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구원에 모아지자는 것이 당연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CWME 보고서, 산안토니오, 1989)’. …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종교적인’ 추구와 발견 가운데 함게 계셨음을 인정하며, 그들의 가르침 속에 진리와 지혜가 있고 그들의 삶 속에 사랑과 경건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들은 우리 가운데서 발견되는 지혜, 통찰, 지식, 이해, 사랑, 경건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선물인 것이 분명하다. … 종교의 다원성 안에 현존하고 활동하는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구원 활동이 어느 특정 대륙, 문화(종교), 민족 그룹에 국한되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이 보존해 온 고유하고 다양한 종교적 증언들을 무시하는 처사는,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며, 만유의 주라는 성서적 메시지를 결국 부인하는 결과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장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종교다원성은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될(고전 15:28)’ 때를 대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호기를 제공한다.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하나님을 이웃종교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에 우리를 개방(CWME 보고서, 산 안토니오, 1989, 29항)”해야 한다.

…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는 그 완결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다라 다양한 방식으로 중개되고 표현되었다. (구원은) 자신들을 영적으로 권면하고 계도하는 종교전통의 틀 안에서 확고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스도 무리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허락될 수 있다(요 10:16).

… 대화 안내서(1979)가 제기한 질문 ‘교회 밖의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며 유익한가(23항)?’에 우리가 긍정적인 답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타종교 신앙인들의 삶과 종교 전통 안에 성령 하나님이 활동한다는 데에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언한다.

다른 종교 전통의 남녀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면 종교 상호간의 대화에 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확고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과 다른 그들의 종교적 확신도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 성취했고 또 성취를 계속하고 있는 일들을 경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을 통해 쌍방 각자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회심(conversion)으로 나아가게 한다. … 종교간의 대화의 실천은 기존 신학의 방법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 종교다원주의의 도전과 대화의 실천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헌신의 신선한 이해, 새로은 질문들, 더 나은 표현을 찾아 우리들이 마땅이 수행해야 할 과제들의 일부분이다.

2. WCC의 ‘인류연합 운동’과 J. 웨슬리의 ‘선교를 위한 연합 운동’

필자는 교회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른 동기로 연합운동을 시행하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보장될 것으로 알고 있다. 선교신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교회일치운동을 선교와 분리해 생각할 수가 없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들었고,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에 앞장서게 되었다. 선교를 하면 자연히 효과적 선교를 위해 교회연합이 요청된다. 오늘날 WCC가 선교를 하지 않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변질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고,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필자는 WCC가 인류연합을 위해 선교를 포기한 에큐메니칼 운동과, 존 웨슬리가 선교를 위해 연합운동에 실패한 사실을 일례로 제시하면서, 한국교회가 앞으로 행해야 할 세계 선교와 교회연합 운동에 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바란다.

▲3부 논문발표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2.1. WCC의 인류연합운동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1961년 제3차 WCC총회 때 많은 신생교회들과 러시아 정교회가 가입되면서 기조가 바뀌었다. 그들의 신학도 역시 이 때부터 더욱 세속화되고, 1966년 주창된 혁명신학을 통해 사회정의 및 Shalom공동체(왕국)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연합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61년 제3차 뉴델리 WCC총회에서 나타난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는 이 총회의 제3분과 회의에서 나타난 복음 개념이다. 이 분과에서는 교회연합을 조직적 삶의 형태나 제복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부르심 받고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코이노니아라고 하였다. 이 코이노니아는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함께 고난과 기쁨을 당하고, 함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이 연합은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함과 진리 안에서 주시는 연합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전적인 연합개념과 일치해 제1분과에서 또다른 ‘연합’ 개념이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죄와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인류는 우리의 형제요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계급, 피부색, 종교에 아무런 차이 없이 인간이라는 공통성으로 모든 민족과 연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형제관계(Bruderschaft)라고 한다. 이와 같은 비기독교인들과의 연합운동은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제4차 WCC 총회에서 ‘교회의 보편성(Katholizität)’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제1분과 회의에서 사용한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일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말했다.

1948년 제1차 WCC총회부터 1968년 제4차 WCC 총회까지 총무였고 명예회장이 된 W. A. Visser’t Hooft는 WCC 총회에 대해 “이제 선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일치(Einheit der Menschheit)’가 관심사이고, ‘기독교 연합운동’이 아니고 ‘인류 연합운동(nicht der christliche, sondern der menschliche Ökumenismus)’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세속적인 연합운동과 세계 공동체는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WCC 총회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 나이로비대회 제3분과에서는 ‘공동체의 추구’라는 제목을 다루며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타문화인들과 이데올로기들과 더 큰 공동체를 추구한다”고 하였다. Visser't Hooft가 말한 것처럼 이제 교회의 연합시대는 지나가고 확장된 의미로서 에큐메니칼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대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WCC는 이듬해(1971년) WCC 내부에 ‘산 신앙인들과의 대화-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이 대화- 프로그램의 초대 책임자였던 S. 사마르타는 서뱅갈 세람포대학 철학과 종교역사학 교수였다. 그는 타종교와의 ‘대화’만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희망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이제 교회연합(Ökumene der kirche)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류연합(Ökumene der Menschen)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과거 교회들간의 대화를 넘어 이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세계공동체 형성을 위해 모든 종교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총회 중앙위원회 의장이었고 인도 공산주의 활동가이며 정치투쟁가였던 M. M. Thomas는 나이로비 총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제목을 다루면서, 첫째로는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형성할 것”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근거로 한 투쟁의 영성을 통해 구조악을 깨뜨린 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주장했다.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통해 교리적인 차이는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omas는 이러한 혼합주의를 ‘그리스도와 관련된 혼합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는 이 혼합주의 공동체를 종교적 차이를 초월하고 참 인간이며 모범적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창조주이며 구원주이신 하나님이 타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신다고 하였다. 그 근거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있다는 골로새서 1장 17절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엡 1:10)”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이단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십자가는 모든 종교인들과 불신자들과 하나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문화와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Thomas는 인류연합을 위한 투쟁의 영성을 주장하며, 투쟁으로서 거짓된 힘, 즉 인종차별, 자본주의, 제국주의, 성 차별주의 구조로부터 인류를 해방하자는 것이다. 나이로비 총회의 주제이자 Thomas의 강연제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뜻은, 그리스도는 사회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화적이건 종교적이건 사람을 종속시키는 모든 연합을 파괴하고, 더 성숙한 연합을 위하여 남녀를 해방하며, 이 연합이 다시금 종속적으로 되면 또 다시 파괴한다는 것이다.

위의 맥락에서 WCC 중앙위원들은 2013년 부산총회를 준비하며 모든 피조물의 일치를 도모하여 2012년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만장일치로 ‘새로운 선교성명서’를 공포하였다. 선교 모라토리움과 상반적인 고백처럼 보이는 이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eing Landscapes)’의 결론부 서두 제121-125항에서 매 항마다 특히 강조하는 선교의 목적은 ‘피조물 전체(whole creation)’ 내지 창조물의 통일성(integrity oif creation)의 자유와 건강과 화해를 통한 ‘생명의 충만(fullness of life)’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 선교선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화해’란 단어는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가시적 초대형 혼합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연합’ 개념은 교회의 세속화를 위한 개념이고, 복음과 신앙고백의 토대와 세계 선교를 위한 목적을 멀리 떠나버린 비고백적 개념이 되었다. 이렇게 연합한 교회는 세속화로 인하여 거룩성을 상실하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렘 17:9)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2.2. WCC의 일원론적 역사관

WCC가 인류연합운동을 추구하고 종교다원주의 및 종교혼합주의를 당연하게 수용하는 데는 원인이 있다. 이미 1960년대부터 WCC는 하나님의 활동을 교회 활동에 국한시킬 수 없다는 의미로 ‘교회 벽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교회를 세상의 한 부분이라고 하며, 세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고, 세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세계 속에 활동하심으로 세상과 격리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불복종하는 것이며, 교회의 역할은 비기독교인들과 대화하고 교제하며 비기독교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수용할 파트너의 역할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WCC의 신학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6:14-18). WCC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천국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셨다는 이유로 오직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옛 질서는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낙관적인 역사관에 심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일원론적 역사관과 현재적 구원관으로 WCC는 회개를 통한 개인구원과, ‘불신자의 멸망’과 ‘미래적 천국’관을 상실하고, 대신 총체적 개념으로 ‘세계, 새로운 질서, 역사, 역사 속’이라는 단어들로 대체하였다

초기 ‘세계선교협의회(IMC)’에 유입된 미국의 ‘사회복음주의 신학’ 이후 유사한 해방신학 및 WCC 신학의 공통성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하나도 제외될 수 없다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한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주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 또는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놓쳐버렸다.

그러므로 WCC는 교회를 인류와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부름받았고, 교회는 세상에서 Shalom을 제시하고 선포해야 한다고 한다. 과거의 선교는 중심으로부터 변두리로 향했고, 선교는 빈번히 포교(propaganda)로 왜곡됐으며, 사람을 기독교인의 이미지로 만들거나 교회의 탈(likeness)을 쓰도록 시도한 것인데, 이것은 선교를 변질시킨 것이라고 한다.

WCC의 하나님은 위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이고,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보편성을 강조하는데, WCC가 오직 하나인 온 세상의 역사만을 인정하는 일원론적인 역사관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불신자를 포함한 전세계이다.

1960년대 WCC의 공식문서 ‘세계를 위한 교회’도 일원론적 역사관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들은 전통적 신학이 이중적인 역사관을 지녔다는 것과 교회 역사와 세속 역사를 구별하여 왔다며 비판하였다. 새로운 신학적 스타일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은 교회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질 수 없고, 역사는 특별한 역사가 아니라 ‘온 인류의 전체적 역사’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속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활동을 찾아야 하며, 그 세속 사건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WCC Missio Dei 신학의 상징적인 인물인 J. 호켄다이크는 구속사와 세속사의 이중 역사관을 버리고, 일원론적 역사관을 수용하였다. Gustav Warneck이 비기독교인에게 가서 교회를 조직하고 세우는 것을 선교라고 했는데, 호켄다이크는 이러한 선교관을 비판하며, 기독교 지역과 비기독교 지역이 따로 있고, 신자와 불신자의 지역이 따로 있어 신앙인이 불신앙인의 경계선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재래적 선교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세계의 목표이고 하나님은 전체 피조물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 교회는 다만 세상의 ‘한 조각’이며, 세상에 부과된 ‘하나의 첨가물(postscript)’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역사밖에는 없다고 한다.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Shalom의 역사이며, 이 Shalom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호켄다이크는 이 Shalom을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Shalom은 인간의 내적 본질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자 인간관계의 사건이라고 한다. Shalom은 상황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또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2.3. J. 웨슬리의 ‘선교를 위한 연합운동’

선교신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교회일치 운동과 선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성도는 복음전도자 내지 선교사역자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개인들은 선교현장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를 위한 교회연합운동이 아니라 인류연합을 위한 운동이다. 필자는 WCC의 이러한 역행을 동의할 수 없다.

존 웨슬리는 철저한 교회연합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연합운동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감리교회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교회 연합’은 무엇을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웨슬리 선교의 유일한 목표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고, 그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이 변화되어 이 현실 속에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사역자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분부했다. 제1차 연회에서도 감리교 대표들은 그 사역의 목적을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밖에 다른 것은 원치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이 웨슬리와 감리회의 존재목적은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제4회 연회는 그 목적을 “우리의 사명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방황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큰길이나 울타리 밖에 나가 억지로라도 그들을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눅 14:23)”고 하는 영혼구원의 강한 소명을 기록하고 있다. 웨슬리는 초기 동정적이었다가 후에는 반감리교가 된 런던의 주교 깁슨 박사에게 편지로 그의 사역목적에 관해 설명했다.

“다만 어둠에게 빛으로, 악마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사단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개종하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게 단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죄에서 회개로 변화시키고 악마의 종노릇하던 자들을 살아 계신 진리의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전하는 것이 정당한 나의 임무라는 뜻에서 “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았다”고 고백한 그는, 그 다음해(1739년 4월 4일) 형 사무엘에게 그의 설교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 절망과 두려움의 마음이 순간에 희망, 기쁨과 평화의 마음으로 변하 며(죄에 매여있는 동안) 죄만 지으려 하던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순수한 욕망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목격해 왔으며, 지금도 거의 매일 목격하고  있읍니다. 어제는 사자 같던 자가 오늘은 양이 되고, 어제는 형편없던 술주정뱅이가 오늘은 모범적인 신사가 되고, 어제는 창녀를 사고 팔던 포주들이 오늘은 육적 쾌락이라면 혐오를 느끼는 현상들을 보셨습니까? 이것들이야말로 제가 전하는 말씀-하나님께선 예나 지금이나 죄를 사해 주시며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데, 이야말로 우리의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열망하는 웨슬리는 그의 논문 ‘이성적이며 종교적인 인사들에게 대한 간곡한 호소문’을 통해서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기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며, 무슨 고생인들 사양하겠는가?”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고 죄에서 구원받고자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감리회에 입회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강한 소명감으로 86세의 나이에도 1년에 3-4천 마일을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하였고, 87세에도 거의 매일 한두 차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 전달에도 신경을 써서 동역자 목사에게 “우리는 낮은 차원의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 할 수 있는 한 제일 평범하고, 간단하고, 쉬운 단어들을 골라” 쓸 것을 충고하였다).

웨슬리의 신학과 선교 메시지는 성경적인 바탕 위에서 전통적이고 체험적이며 성령에 조명된 이성적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주지주의나 체험주의 내지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는 복음주의자였다.

국교회로부터 감리회의 분리를 결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다만 존 웨슬리는 영혼을 구원할 기회만은 거부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가 교회의 분리를 거부한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다른 집단형성으로 말미암아 영향력이 감소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기회가 감소되고, 논쟁에 말려들어 스스로 종교의 정신을 잃게 되고, 형제를 더 사랑할수록 덜 사랑받게 되며, 목적에 상반된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분리는 형제 사랑을 깨뜨릴 뿐 아니라 많은 억측을 자아내고 피차에 지나치게 비판하며, 외적으로도 비종교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선교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47년의 제4회 연회록에, 감리회원들은 그들의 교회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반역이나 살인을 할 지언정 분열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산 몸으로부터 절대로 갈라지지 않는다. …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국교회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 … 우리는 언제나 교회의 치리자나 그 규칙을 가능한 한 순종하되 다만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합치되는 경우에 한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웨슬리가 특히 교회일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선교적 측면에서였다. 감리교도들은 영국 교회에서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성례를 받을 수 있는 한, 국교를 떠나서는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은 적어도 1개월에 2회 이상 교회에 참석해야 했고, 그들 자신의 집회 장소를 교회라고 부르지도 않고 ‘설교의 집’이라 하였으며, 감리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국교의 교리들을 믿고 가르치며 복종할 것을 선언하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이 교회 밖으로 쫓겨나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를 부흥시킨다고 믿었다. 의도적 분리는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만 영혼을 구원할 기회는 거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교회연합 운동은 제도적 일치라기보다는 선교를 위한 일치였다. 그런데 웨슬리는 선교를 위하여 제도적 분리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영국 교회에서 감리교인들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평신도들을 설교자로 안수해야 했고, 속회와 연회를 조직하며, 미국 선교를 위하여 성례집행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평신도가 설교는 하되 성례는 집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수받은 성직자가 있어야 했다. 미국은 또 영국교회 성직자로부터 성찬받기를 거부하고, 영국교회 성직자에게서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웨슬리로부터 독립하여(1785년)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사제 였던 감리회 사역자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 1784년 감리사로 안수하여 미국에 보냄으로써 미국에서 성례를 집행하고, 미국에도 집사, 장로, 감리사 및 총리사가 임직할 수 있도록 했다. 웨슬리는 그 후에 계속 18명에게 안수하였다.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웨슬리의 이러한 처사에 선교적 일치보다 제도적 일치를 더 중요시한 동생 찰스(Charles)는 안수례가 영국 교회와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존(John)은 그가 교회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난폭하게 추방당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회의 분리를 선교의 저해로 보았으나,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일치할 수 있다는 ‘제도적 일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제도와 선교가 다 중요한 것이지만, 그는 선교를 위하여 제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찰스와의 견해적 차이였다.<계속>

/이동주 교수(아신대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