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참회’의 어거스틴(386년 8월)! 세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환희’에 넘친 어거스틴(387년 4월)!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님과 동족들을 섬기기로 결단을 했다. 복음을 제일 먼저 고향에 돌아가서 이웃과 동족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고 사도들이 실천한 방법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평양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처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영적 교제의 ‘기쁨’을 누렸고 또한 어머니와 이별하는 극도의 ‘슬픔’을 경험했다. (387년 말) ‘참회’와 ‘환희’와 ‘기쁨’과 ‘슬픔’은 어거스틴 신앙에 거름과 자양분이 됐다. 이제 어거스틴은 388년 고향 칼타고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일행이 388년 말경 칼타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카시키아쿰의 은둔자들이 아니었고 신앙 공동체의 삶에 뛰어든 ‘하나님의 종들’(Servi Dei)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어거스틴의 출생지 타가스테(Thagaste)에 가서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 지방 성직자들의 예방을 받았고 어느 경건한 관리의 집을 숙소를 정해 존경 받는 생활을 하게 됐다. 선량한 카톨릭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곤 했다. 어거스틴이 내세운 이상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deificari in otio)이었다.

타가스테에서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조직된 생활을 밀접하게 접했다. 밀란에서는 이방 나그네였지만 여기 타가스테에서는 지역 공동체의 주민이었다. 이곳 카톨릭 교회는 강력한 대적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이교도들, 마니교도들, 도나티스트 분열주의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대적들이었다. 카톨릭과 최고의 이단으로 통한 마니교 사이의 알력은 심각했다. 이런 환경에서 저술된 어거스틴의 마니교 반박서들은 분명히 ‘교회론적’인 저술이었다. 마니교를 반박한 그의 창세기 주석도 그가 최초로 발간한 ‘교회론적’인 팜플렛이었다. 그는 그것을 간결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문체로 썼다.「참된 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란 책은 그의 입장을 약술한 명저인데 그는 로마니우스와 같은 상류층 마니교 동조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세심하게 집필하여 출판했다.

어거스틴이 타가스테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의미심장하고도 신비스러운 변화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창조일들(Days of Creation)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그는 여전히 ‘궁창의 빛들’과 그것의 ‘영적인 의미들’을 명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육체를 떠난 명상의 생활은 이내 아주 공허하게 보였다. 이러던 중 죽음의 사건이 그의 삶에 개입됐다. 가장 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죽은 것이었다. 사망 일자는 모른다. 이 이중적 죽음의 충격은 어거스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백 중의 하나가 됐다. 그의 대화록 「주인에 대하여」(De Magistro)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흡사 그의 아버지 어거스틴과 같았다. 지적이고 세련되고 유능했다. 어거스틴은 그가 쓴 마지막 책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나타내고자 시세로의 귀절을 인용했다. 과연 시세로의 말은 모든 아버지들의 심정일 것이다. 시세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모든 일에 있어서 나보다 뛰어나기를 내가 바라는 유일한 인물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슬픔과 공허함 때문에 더 활동적인 생활로 줄달음쳤던 것 같다. 어거스틴은 수년 전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고 지금 또다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하던 아들과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네브리디우스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달콤한’ 친구였고 고향 친구였다. 그는 어거스틴을 따라서 칼타고를 떠나 밀란까지 갔었고 다시 어거스틴을 따라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삼중적 슬픔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서 동족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조용한 명상의 삶 이상의 삶을 살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신앙 공동체들을 책임지는 활동적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391년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1년 전만해도 그의 죽어가는 친구 네브리디우스를 보려고 여행하는 것조차 거부했던 어거스틴이 언덕길을 넘어 옛 항구도시 히포로 발걸음을 옮겨놓은 것이었다. 히포(Hippo)는 10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200여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식 생활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5,6천 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극장이 세워졌고 커다란 공중 목욕탕이 세워졌고 신전이 세워졌다.

히포에서 어거스틴은 신앙공동체를 조직하고, 항구적인 행위규범에 입각한 대인관계를 수립하며, 많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안녕을 책임지고, 그들에 대해 실제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섬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의 은거지에 모여든 열성가들의 그룹은 서서히 어거스틴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고 그곳은 하나의 ‘수도원’형태를 이루게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의 삶이 성경 읽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성경을 통해 영적 무장을 할 때 아프리카 교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391년 봄 히포에 도착했을 때 어거스틴은 중년에 접어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새로운 정복의 땅을 더듬어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