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쉬타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주 똑똑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제들을 더 오래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생각해 보고 더 고민해보고
아픔과 상처도 곱씹어 보아야
문제가 풀리는 법이며 

비로소 한 인간도 성숙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한 시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닌지요?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오래 붙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아니 그 술책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경제 성장과 때론 사회적 책임이라는 미명 아래
심지어 힐링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말입니다.

경제적 이익과 실적을 위하여 쉽게 부수고 해체시켜 버리고 
한 인간이 겪고 감내해야 할 것조차
쉽게 사회적 책임이나 남들 때문으로 둔갑시키고
심지어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고통 회피의 가벼운 습성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산통 없이 태어나는 아기나 어머니는
결코 그 고통의 산도를 타고 내어난 아기와 산모가 가지게 되는 
그 숭고한 사랑과 생명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케이블카나 헬기를 타고 산을 넘은 사람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근육의 고통을 느끼며 산 바람을 맞으며
산을 넘은 사람이 지니는 그 산과의 신비로운 교감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나 삶의 의미
그리고 보다 나은 과학이나 인간적인 사회는  
오래 붙들고 생각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이주연>

* 오늘의 단상 *  

언행을 일치하십시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말은
부도난 수표와 같습니다.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