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에 온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순례자 선생님, 좀 불편하시더라도 오늘 당장 내국인 호텔로 옮기시지요.”

어느새 친구가 되어버린 룬다사 씨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여서 외국인을 위한 하람베 호텔에서 피아자 거리에 있는 내국인을 위한 다하브 호텔로 숙소를 옮겼습니다. 냄새나는 이부자리며 재래식 화장실이며 찬물만 나오는 샤워장 등 불편한 점이 많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에티오피아의 서민들을 시시로 접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무엇보다도 숙박비였습니다. 하람베 호텔에서는 하룻밤 숙박비가 200비르(약 25달러)였는데 다하브 호텔의 숙박비는 10분의 1인 20비르에 불과했습니다.


아디스 아바바에서 첫번째 맞는 주일날, 순례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제일 크고 이름난 성 게오르게(St.George) 정교회 성당의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성 게오르게 성당은 1896년 에티오피아 국군이 수호 성인 성 게오르게의 도움으로 아드와(Adwa) 전선에서 이탈리아 군대를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11년에 메넬리크 황제가 세운 교회입니다.

숙소를 떠나기 전 호텔 여주인 다하브 할머니는 제가 동행하고 싶다니까 무척 기뻐했습니다. 에리트레아 출신으로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한 후 에티오피아로 건너와 52년 넘게 살면서 서민들을 위한 대중식당과 여인숙을 경영하고 있는 다하브 월두(Dahab Woldu) 할머니(71세)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어 동네에서 존경과 흠모를 받는 분입니다. 다하브 할머니는 저에게 10센트짜리 노란 동전을 한 주먹 가득 건네주면서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2를 교회와 구제기관에 기부하는 여인숙 주인 다하브 월두 할머니와 함께.
성당은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습니다. 성 게오르게 성당 정문에 가까이 이르자 성당 주변의 담 밖에는 하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러 온 신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어서 다른 주일날에 비해 더 많은 신도들이 모여 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입구에는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누더기를 입은 걸인들과 집 없어 갈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한 줄로 앉아서 적선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는 앞서 걸어가는 다하브 할머니를 따라 버림받은 사람들의 손에 동전을 한닢씩 쥐어주었습니다.

▲교회 앞과 거리 주변에는 걸식하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즐비하다.
-주님, 이 헐벗고 굶주린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잠 잘 곳이 없어 쉬지 못하고 마실 것이 없어 목말라하는 이 시든 영혼들에게 보금자리와 마실 물을 주시옵소서.-

이방 남자의 온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끄럼 없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스무 살 전후의 한 여자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읍소하는 눈매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크고 또 맑게 반짝였습니다. 그녀의 눈썹은 그린 듯이 유난히 까맣고 짙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순례자는 집 없이 떠다니게 된 그녀의 베일에 가려진 사연을 이리 저리 추측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내가 이 여자를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순례자는 재킷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비상으로 넣어둔 1비르(약 120원) 짜리 지폐 서너 장을 꺼내어 여자의 까만 손에, 때가 끼어 까만 손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구스 족의 까만 염색소의 손에 저의 지극히 작은 긍휼과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몇 푼 되지 않는 물질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는 내 손과 그 알량한 돈을 감지덕지 받는 그녀의 손 사이에 가깝게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간 아주 조그마한 실낱같은 연민의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두터운 장벽의 현실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위해 이렇게 중보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여자를 도울 수 없습니다. 설사 제가 이 여자를 도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회용으로 끝나는 미미한 것일 뿐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친구 삼으시며 희생적인 삶을 사셨던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하여 이 여자를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에바다(열쇠) 되시는 주님, 이 여자의 현실적인 삶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주님은 이 여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 주십시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