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씌워주는 선행 여성 기독교인
▲지난 2023년 8월 이 여성은 우산을 씌워준 후 돈 3만 원을 뽑아 노인에게 건넸다고 한다. 신분을 밝히길 거부한 이 여성은 “기독교 신앙이 있어서 해야 할 걸 당연히 했다”고만 전했다고 한다. ⓒ유튜브

17년을 우간다에서 선교한 선교사 한 분이 최근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30대 후반에 선교사로 나와 황금같은 젊음을 선교에 바쳤다. 학교에서도 가르쳤고 제자훈련도 했고 마지막엔 방송 사역을 시작해 우간다, 콩고, 남수단 영혼 150만여 명이 매일 그의 방송을 들었다. 고사리같은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의 자녀들은 이제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우연히 만나 왜 돌아가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젊을 때부터 교회 하나를 개척하고 싶었는데, 더 늦기 전에 결단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교회냐고 물었더니 ‘선교적 교회’라고 했다. 선교적 교회란 말이 귀에 들어와 책장을 뒤져 <선교적 교회 개척(애드 스테저)>이라는 책을 그에게 건넸다. 그 책이 그에게 격려가 되었는지, 그는 빅토리아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나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했다.

힘들게 고국을 떠나 선교지로 왔다가 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선교사,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가 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를 보며, 나는 오늘 우리의 선교지가 어디인지 물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 그리고 다시 돌아온 베들레헴, 그들에게 선교지는 어디인가? 모압인가? 베들레헴인가? 그는 지금 선교지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를 떠나 또 다른 선교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선교지를 공간적으로 구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선교차 아프리카 이곳 저곳을 다녀보면, 의외로 낯익은 한국인을 만날 때가 있다. 시장에서는 바나나와 망고를 사는 빨간 모자의 젊은이도 만나고, 시골로 가는 버스에서 사람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는 한국인도 본다. 아프리카는 이제 슈바이처나 이태석 같은 선교적 영웅만 오는 곳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은 더 이상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국이 아니다. 교회마다 어린이와 청년부가 사라졌다고 걱정하고, 여전히 전도가 힘들고 교회 여기저기 빈 자리가 많은 것은 코로나의 여파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전에 유럽 기독교 국가의 ’재복음화‘를 꿈꾸며 떠났던 한국의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와 한국을 재복음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은 또한 역사상 최고의 선교의 기회를 맞고 있다. 평생 숨어서 선교해도 한두 사람 전도할까 말까한 히잡쓴 아랍 사람들, TV에서 본 까만 아프리카 사람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아시아 사람들을 우리는 지하철에서 쉽게 만난다. 제발로 찾아 들어온 수많은 세계인들이 오늘 우리의 새로운 선교지다.

아프리카에서 한다고 더 헌신적인 선교도 아니고, 한국에서 한다고 덜 헌신적인 선교도 아니다. 선교를 결정하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소명이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냈기 때문이요,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곳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은 어디나 거룩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다.

선교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면, 남은 것은 본질의 문제다. 무엇이 선교인가? 선교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선교는 교회 선교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장이 한다.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위임받아 선교적 매개의 역할을 할 뿐, 교회가 선교의 주체는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먼저 생각한다. 순서를 말한다면, 교회가 있어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있어 교회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선교를 두신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 교회를 두셨다(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오늘도 하나님은 스스로 쉬지 않고 선교하신다.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선교의 모델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땅에 오신 하늘의 사람, 우리와 함께 사신 초월자시다(above-in the midst). 선교는 선교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의 문제다. 우리가 멀리 갈수록, 깊히 내려갈수록, 그리고 오래 다가갈수록 더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 한 옛 시인의 말이 선교의 정신을 말했다.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이 아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세우라
그들이 믿는 것으로 살게 하라

선교는 다만 가는 것이 아니라, 보냄받고 가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고, 그나마 무거운 짐진 사람에게 가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데, 어린이들이 그 짐을 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짐을 없애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요, 우리는 다만 짐을 함께 밀고 갈 뿐이다.

짐은 무겁다.
그래서 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돌다리도 짐을 지고 건너면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남남인 것은 서로의 짐이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은 짐이 있기 때문에 가깝다
짐이 있기 때문에 가족이요
가족이기 때문에 덜 무겁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될 때
그는 나에게 형제다.

“사람이 함께 서서 어깨를 마주하고 서서 마주보는 것이 교회라면, 어깨를 마주한 채 함께 밖을 바라보는 것이 선교다(레너드 스윗)”.

우연히 한 노인이 무거운 짐을 싣고 길을 가는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이 자기가 쓰고 있던 우산을 노인에게 받쳐 주었다. 자세히 보니 여성은 노인에게 우산을 받쳐주기 위해 자기 온몸을 구푸렸고, 그때 그의 온몸은 비에 젖고 있었다. 선교는 비 맞는 노인에게 자기 우산을 받쳐주고 자신은 기꺼이 비를 맞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간 아프리카 선교사가 그의 꿈대로 아름다운 선교적 교회를 세우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교회다. 그가 많은 사람을 모아 큰 교회를 세우든, 이 땅에 온 나그네들을 섬기든, 그가 선교적 교회로 산다면 그는 이미 아름다운 교회다.

혹시 우리가 그처럼 교회를 세울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매일 무거운 짐진 자를 밀어주고 비맞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으며 그리스도를 말하고 예수를 보여준다면, 우리가 어디 있든지 이미 교회다. 우리는 매일 어디에 있든지 선교적 교회로 산다.

이윤재
▲이윤재 선교사 부부.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