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장 1-11절: 선교와 동기

아나니아 삽비라 라파엘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Raphael, 1483-1520)의 ‘아나니아의 죽음(The Death of Ananias, 1515, painting)’.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소장.

선교의 바른 동기는 무엇인가? 현재 한국교회의 잘못된 선교 동기를 찾아보자. 이런 동기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한국교회의 잘못된 선교 동기들이 가져오는 문제점들은 무엇이며, 그 시정을 위한 방안들은 무엇일까?

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그랬을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사도행전을 읽어 나가며 은혜를 받던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한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 가운데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능력 있게 성장하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사도행전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모습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당시 여러 사건들 가운데 한 사건을 진솔하게 그려내면서, 독자들에게 유익한 경고를 제공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좀 심한 형벌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일을 한 베드로가 죄에 대해 너무 과한 벌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유에서 클라우스너(Klausner)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기보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후 죄책감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하고 얼마 후에 죽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 나타나는 아간의 경우처럼 그들의 눈속임 행위가 단순한 개인적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승승장구 전진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죄가 널리 퍼져갈 수 있었기에 미리 막는 차원에서 단호하게 조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성령과 교회를 속이는 죄였고, 이러한 죄는 하나님의 선교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일이었기에 성령께서 단호하게 저지하신 것이었다. 이 일의 결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는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이 같은 종류의 죄악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경각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했을까? 그들이 이런 일을 하게 된 동기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욕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걸맞는 것 이상의 선행에 대한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들은 거짓과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외적으로 드러나게 많은 헌금을 했고 많은 봉사를 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의 봉헌을 악용해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욕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자신들도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희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땅을 팔아 받은 돈을 다 바치지 않고 일부만 바쳤으면서도 땅값 전부를 바쳤다고 거짓말을 하여 교회와 성령 하나님을 속였다. 사단은 이들 부부의 공명심을 이용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일치를 깨뜨리려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지나친 경쟁심에 이끌려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재산을 팔아 바치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거액의 헌금을 함으로써 바나바 못지 않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이런 잘못된 동기들이 교회에 독버섯처럼 번져갈 때 교회는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교회는 뿌리부터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뿌리채 흔드는 이런 죄악된 동기를 뿌리뽑고자 하셨던 것이다.

아나니아 삽비라 브레시아 보석함
▲4세기 후반 브레시아 보석함(Brescia Casket) 뒷면에 새겨져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이탈리아 산타 줄리아 박물관 소장.

2. 한국교회의 선교 동기는 어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잘못된 동기로 헌금을 했기 때문에 헌금을 하고도 생명을 잃었다. 한국교회도 열심히 선교하고 있지만, 그것이 잘못된 동기라면 하나님께 크게 책망을 받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도 선교 동기가 퇴색돼 간다는 지적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 잘못된 선교 동기는 ①제국주의적 동기 ②문화 이양 ③상업적 동기 ④교단적 식민주의 즉 교단 이식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①해외 여행 경험 ②경력 쌓기용 ③미국 입국 위한 과정 ④목회지가 없어서 ⑤현실 도피 ⑥식견을 높이기 위해 ⑦저개발국 개발 ⑧영웅심과 탐험심 ⑨공부 기회 ⑩가난한 민족에 대한 감상적 동기 ⑪영어 습득 ⑫이성 문제 ⑬더 좋은 자녀 교육 기회 등을 위한 선교 사례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많은 교회들이 선한 동기로 선교를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있지만, 다른 교회들이 다 선교를 하는데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교회라는 인상을 줄까 체면을 위한 장식품으로 선교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또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부목사로 데리고 있던 사람을 보낼 적절한 임지가 없어 선교사로 나가게 하는 경우처럼, 교회 구직난 해소를 위한 방편으로 선교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또 선교를 통해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고 이로써 교회성장을 가져오려는 교회 성장 수단형 선교 동기도 있다.

심지어 목회자들의 해외 여행 구실을 만들기 위해 선교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지의 필요보다는 얼마나 손쉽게 가서 쉬다 올 수 있는가에 따라 선교지가 결정되기도 한다.

교회의 잘못된 동기에 의한 선교와 더불어, 선교사로 지망하는 개인도 잘못된 동기로 선교를 지망하는 경우도 흔하다. 국내 교회 개척의 어려움이나 임지 부족 현상으로 갈 곳이 없어지니 도피적으로 선교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교지를 택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후원을 받아 공부도 하고 경력도 쌓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혜택이 있기에, 더 선호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해외생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허영심에 들떠 선교사로 지망하는 경우도 있고, 보다 나은 자녀 교육 기회를 위해 선교사로 지망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잘못된 동기에 의해 선교를 시작하면 많은 경우 선교는 허울뿐, 열매가 없거나 문제만 만들어내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아나니아 삽비라 푸생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삽비라의 죽음(The Death of Sapphira, 1652, oil on canvas)’.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3. 잘못된 동기에 의한 선교 결과들

1) 외형 또는 결과 위주 선교 수행

선교가 순수한 구령의 열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체면과 업적 자랑 혹은 교회 성장 수단이라는 동기에서 시작될 때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선교가 지나치게 외형 혹은 결과 위주의 사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의 업적을 자랑하고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려면 외형상 드러나는 것이 많을수록, 선전 효과가 뛰어날수록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렵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보다, 빠른 시간 내에 뭔가 눈에 드러나는 결과를 보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프로젝트형 사역을 많이 하고자 한다. 아직 교회를 짓거나 신학교를 세울 만한 조건이 아님에도, 어거지로 건물을 지어 선교 업적 자랑을 하려는 경우가 많다.

또 교회의 업적 과시형 선교 요구에 맞추려다 보니, 선교사도 소신 있게 차근차근 선교를 하기보다 파송단체나 후원교회들이 선호하는 실적 위주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선교비를 많이 모금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 지역의 선교 여건을 따르기보다 경쟁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지에서 차분하게 사역자를 키우고 훈련하기 보다 돈을 주고 사역자를 고용해 단기간에 많은 교회를 세워 역량을 과시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선교는 소위 말하는 ‘돈 선교’가 이뤄진다. 즉 돈으로 현지인 사역자를 매수해, 현지인 사역자들은 목회에 대한 관심보다 선교사에게 잘 보여 어떻게 하든 더 많은 돈을 긁어내는데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고,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선교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기존 선교사를 버리고 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지 사역자들은 선교사가 떠날 경우 시무하던 교회를 팔아먹고 잠적하거나,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2) 부실한 선교사 선발 및 훈련

앞서도 언급했듯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꼭 필요한 지역에 필요한 사람을 선정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 헌신도도 적고 자질도 없는 사람을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교사를 선발할 때 참된 복음 전파의 동기보다 관계나 상황 등의 잘못된 동기로 선교사가 선발되는 것이다.

덧붙여 지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선교 훈련을 전혀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아주 부실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제3세계 선교사들 가운데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주로 한국 선교사들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지적한 서양 선교사가 있을 정도다.

실제로 선교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고 선교지에 와서 사역을 하다 보니 현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늘 현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며, 현지인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선교사 부부들도 종종 보게 된다. 이태웅은 선교훈련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 훈련을 받지 않은 선교사가 파송됐을 때 그 선교사는 자신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선교단체와 현지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 나아가 인접 선교 기관들에게까지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선교 훈련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지 교회는 한국 교회의 고도성장과 그 명성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훈련받지 않은 선교사의 비인격적인 태도나 비 선교학적인 선교사역 형태로 말미암아 애써 쌓아놓은 한국교회의 명성을 추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잘못된 선교사 선발과 부실한 선교 훈련의 근원에 잘못된 선교의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동기 즉 시작이 잘못돼 있는데 헌신된 선교사가 선발될 수 없고, 그런 선교사들에게 훈련을 많이 시킨다 한들 훈련의 결과가 좋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자신들을 위한 선교 수행

선교는 현장이 필요로 하는 선교를 해야 한다. 선교사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 필요도 없는 지역에 파송 교회나 선교사의 필요에 따라 선교사가 나가게 되면 안 된다.

또 선교는 현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현장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보내는 것은 선교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현장보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선교를 하는 폐해 중 하나는 모든 것에 ‘선교’를 붙이는 경향이다. 이민 가는 사람도 선교사라고 부르고, 대학에 떨어져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서도 선교사라고 한다. 또 그들을 관리하러 가는 사람도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보낸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알마타에는 대학에 떨어진 학생들을 모집해 ‘선교단’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그 관리자는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브로커 역할을 하고 벤츠를 몰고 다니며 돈을 버는 어이없는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선교는 현장이 필요로 하는 기간만큼 수행돼야 한다. 즉 선교사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선교를 하고 다른 사역으로 변경을 하든지, 선교사가 더 필요한 지역으로 새롭게 투입돼야 한다. 선교의 동기가 잘못될 경우 기본적으로 선교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선교를 하기에, 현지의 형편보다 자신들의 필요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그래서 선교 현장의 필요를 고려치 않고, 파송 교회와 선교사의 필요를 위해 계속 남아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떠난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보내는 선교비로 먹고 살며, 한 달 동안 하는 일이라곤 고작 자신을 지원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보고서와 편지 쓰는 일뿐인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현지를 고려하지 않기에 현지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지 교회와 등을 지고 있어 선교에 큰 장애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나니아 삽비라 얀 스테인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테인(Jan Steen, 1626-1679)의 ‘아나니아의 죽음(The Death of Ananias, 1651, oil on canvas)’.

4. 바른 선교 동기를 소망하며

그렇다면 참으로 바른 선교의 동기는 무엇인가? 화란 자유대학 선교학 교수였던 버카일(J. C. Verkuyl)은 바른 선교의 동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순종의 동기(the Motive of Obedience)

선교의 가장 1차적 동기는 순종, 즉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선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헨드릭 크레머는 선교학을 가리켜 ‘순종의 신학’이라면서 “선교를 거부하는 것은 주께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초대교회는 선교에 사로 잡혔다. 윌리암 캐리도 “당신은 왜 선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것은 주님의 뜻입니다”라고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2)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동기(the Motives of Love. Mercy and Pity)

선교의 동기가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에 근거를 두어야 할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대상이 되어 구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바울도 이런 사랑을 체험했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편지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고 말했다. 선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철저히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돼야 하는 것이다.

3) 영광의 동기(the Motive of Doxology)

‘하나님의 영광(Gloria Deo)’이라는 말은 많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에 영감을 준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 신성의 충만이자 존재의 현현이다. 그의 영광의 현현은 성도에게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감사를 낳는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의 거룩한 사랑, 그의 은혜, 그의 자비, 그리고 공의가 인간에게 비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에 사로잡힌 바 된 성도는 그 분의 영광스런 실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그로 인해 그분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해 선교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4) 종말론적 동기(the Escatological Motive)

주기도문에서 두 번째 간구의 기도는 “나라가 임하옵시며”이다. 그 기도는 주의 왕국이 완성되는 것을 소원하는 기도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soma tou Christou)의 충만함(pleroma)을 소원했다.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함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바로 주의 나라가 임하는 표지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주님 말씀대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은 종말의 날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주의 왕국에 대한 열망과 아울러 이방 가운데 그의 왕국의 충만함(확산)을 소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고 단순한 하나의 친교 모임일 뿐이다. 살아 있는 교회라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모든 이방인들올 모으는 데 고동치는 열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5) 화급의 동기(the Motive of Haste)

주의 왕국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 느슨할 수 없고, 화급히 서두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열심히 동네에서 동네로 다니셨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 5:16)”고 했고,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고 했다.

인간에게는 무한정 시간이 많지 않다. 고로 시간 낭비 없이 목적 추구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때와 시기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며,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때와 시기를 놓치지 말고 주의 일에 열심히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6) 개인적 유익의 동기(the Personal Motive)

바울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늘 바라보았으며, 이 면류관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을 드린데 대한 상으로 주어짐을 확신하였다(딤후 4:7-8). 나일스(D. T. Niles)는 “고인 물은 썩어버린다”면서 계속적인 복음 전달의 흐름이 우리 삶을 계속 새롭게 한다고 말했다.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영생의 샘물을 그 샘에서 퍼내는 것처럼 결코 마름이 없다(요 4:14). 복음의 나눔이 없을 때, 교회는 내향적이 되고 논쟁적이 된다.

잘못된 선교의 동기들과 그 결과들을 살펴보았고, 바른 선교의 동기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선교의 바른 동기와 바르지 못한 동기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도, 실제적으로 이것을 명확하게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선교의 동기는 미묘하게 혼재된 경우가 많다. 어느 누구도 100% 순수하고 바른 동기에 의해 선교를 수행했다고 자신 있게 손 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늘 진실되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선교할 수 있도록, 늘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세를 견지할 뿐이다. 선교의 동기가 잘못될 때 아무리 그럴듯한 외형이 갖추어지고 숫자가 늘어난다 해도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가 아니며, 오히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큰 저주를 받을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안승오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 석사(Th.M) 학위와 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7 Key Principles of Dynamic Church Growth』, 『Rethinking the Theology of WCC』, 『선교사가 그린 선교사 바울의 생애』,『능력 있는 예배를 위한 7가지 질문』, 『건강한 교회 성장을 위한 핵심 원리 7가지』,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현대 선교학 개론』(공저),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성장하는 이슬람 약화되는 기독교』,『현대 선교신학』, 『현대 선교의 핵심 주제 8가지』,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현대 선교의 프레임』, 『제4 선교신학』,『성경이 말씀하는 선교』, 『현대 선교신학(개정판)』, 『현대 선교의 목표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