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브로 태생 바나바, 본명은 요셉
원어상 이름 의미 권고·위로·호소
셋 비슷하지만 ‘권고’ 가장 어울려
복음 이해와 설교 능력 상당 수준

사이프러스 구브로
▲구브로에 위치한 사도 바나바 기념교회. 본지 칼럼니스트 권주혁 장로가 촬영한 것이다. ⓒ크투 DB

3. 흠이 없는 선교의 아들, 바나바

구브로(Cyprus)에서 태어난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요셉을 이런 일반적인 유대식 이름으로 부르는 대신 ‘바나바(Βαρναβᾶς)’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행 4:36). 이렇게 사도들이 요셉에게 특별한 별명을 지어준 것은 이 별명이 그에게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 ‘위로의 아들(υἱὸς παρακλήσεως)’로 번역된 이 별명이 과연 ‘바나바’라는 사람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BAGD(Bauer-Arndt-Gingrich-Danker) 헬라어 사전에 따르면 헬라어 ‘παράκλησις’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①권고(encouragement, exhortation) ②호소(appeal, request), ③위로(comfort, consolation).

이 세 가지 의미는 모두 복음 사역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서로 외연이 겹쳐져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각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은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위로’는 환란이나 고난 등이 전제되어 인내를 유도하도록 소극적으로 쓰이는 단어이고(고후 1:4, 7:4), ‘호소’는 매우 간절하고 급박하게 어떤 행동들을 요구하는 의미를 가진 구체성을 가진 단어입니다(고후 8:4). 그리고 ‘권고(혹은 권면)’는 하나님 은혜 혹은 믿음에 굳게 머물러 있도록 적극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포괄적인 단어입니다(살전 2:3, 딤전 4:13, 히 12:5).

세계 기독교
▲안디옥 교회가 있던 곳으로 알려지는 베드로기념교회. ⓒ위키피디아

이 세 가지 단어의 어감을 비교해볼 때, 바나바의 특성에 맞는 단어는 ‘권고’라는 단어처럼 보입니다. 권고는 환란을 당한 교인들에게 인내를 유도하는 소극적 위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 아니라 ‘권고(혹은 권면)의 아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설교 능력은 사도들도 인정할 정도로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디옥 교회 체계적 이끌 능력자
필요해졌을 때 예루살렘에서 파송
흠 없고 올바르며 성령·믿음 충만
바울 같은 핍박자 감쌀 넓은 마음

안디옥 교회가 많은 이방인들로 부흥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는 능력 있는 감독자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게 됩니다. 이 때 바나바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의 특성(즉 권고의 아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됐고, 따라서 바나바는 추가 동역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하고”, 다시 말하면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며 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즉 바나바는 복음을 증거하는 지도자로서 인격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으로 격려하고 권면하여 교회를 더욱 더 부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나바가 바울과 더불어 ‘사도’라고 불리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행 14:14).

이런 점에서 소극적인 의미를 가진 “위로의 아들”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권고의 아들”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한 것도 “(은혜가 떨어지지 않도록)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행 11:23)”고 한 권고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인 바나바는 다양한 민족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
▲바울의 얼굴을 상상한 그림.

이처럼 ‘복음제일주의’를 지향했던 바나바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핍박한 자들도 감쌀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비록 바울이 한 때 교회를 핍박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는 한눈에 바울의 회심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은 물론 사도들도 혹시 마치 바울이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회심한 것처럼 가장하고 몰래 들어온 거짓 교인이 아닐까 의심해서 바울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단번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바울”을 알아보고, 동역의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가 바울에게 보여준 우정은 요나단의 우정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 가서 3년간 한 일?
알던 율법, 깨달은 복음 차이 연구
자신의 과거 모르는 곳 가서 전도
두 가지 다 함께 일어났다고 봐야

4. 1차 놀람: 바울에게 ‘인정의 손’을 내민 바나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서 눈이 멀게 되고, 이후 다메섹 직가라는 곳에서 3일간 아나니아로부터 치료를 받으며 머물게 됩니다. 기적처럼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된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갑니다. 바울이 3년 간 아라비아 사막에서 무엇을 하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혹자는 엘리야처럼 바울이 시내산으로 가서 복음의 깊이를 더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영민한 바울이라 하더라도, 짧은 순간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그리스도 복음 전체를 명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간 머물면서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율법과 그리스도 복음의 차이를 연구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그룹은 바울은 행동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깨닫는 즉시 가는 곳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행 9:20)”을 전파하였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으며, 특별히 아라비아를 선택한 것은 교회를 핍박한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특별히 어느 한쪽만 지지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연구하는데 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고, 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울이 박해를 피하여 굳이 멀리 있는 아바리아 사막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회심 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너무 부족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복음의 진리가 너무나도 신비스럽고 오묘했을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감당하기 위해 바울은 조용히 아라비아로 가서 묵상할 기회를 찾았을 것이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서자 그 즉시 아라비아에서도 복음 전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페트라 요르단 나바테아
▲페트라 유적지 서쪽 부분에 있는 대(大)신전.

예루살렘 돌아온 바울 의심 받아
모두 피할 때 바나바가 연결시켜
바울의 회심 전혀 의심하지 않아
그간 일어난 일들 듣고 공감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메섹에서 바울이 바구니를 타고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행 9:19b-26). 이 이야기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가기 전 있었던 사건인가 아니면 가고 난 다음 있었던 사건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이야기 다음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이 사건 후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의 비밀을 완전히 깨달은 다음 두 번째 다메섹에 들러 별 사건 없이 지내다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읽힙니다(갈 1:17).

그러나 후자를 택하면 눈을 치료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다음 그곳에서 전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나바티아 왕국의 아레다 왕에게 쫓겨 다메섹으로 도망가, 그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고후 11:32-33).두 번째 설명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3년 간 너무 다른 세계를 체험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영의 손’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였습니다.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은 유대교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 당혹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 사귀고자 했으나, 모두 바울을 두려워하고 피했습니다(행 9:20).

이때 바울과 사도를 연결시켜 준 자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이미 바나바는 바울이 회심 후 겪었던 모든 일들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바울의 회심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행 9:27).

이는 사도들을 포함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을 때,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해 그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세세히 듣고 공감했음을 의미합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