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 왕이여" 환호했던 데서 유래된 날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 죽음을 향해서 들어가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한주간을 고난주간으로 보냅니다. 점점 고난이 깊어지고 점점 주님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그 기간. 우리가 어느때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보내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수난, 하나님 아들의 죽음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써놓은 내용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겟세마네의 기도를 아실 것입니다. 마26장, 막14장, 눅22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도. 붙잡히시기 전에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그 내용과 더불어서 오늘 본문을 볼때, 십자가의 깊은 세계가 더욱 드러납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는 육체에 계실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하실 이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는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습니까. 그래야 이 말씀이 다가옵니다.

사실 건강하고 자기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가운데 이것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죽는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십자가라는 것은 이땅에 가장 비참한 형벌입니다. 가장 잔인한 고문입니다. 그런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그럴 때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드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에 대해서 누가복음에는 땀이 피가 될정도로 기도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극한에 이르면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 히브리서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처절하게 기도드리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안보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신데, 그런 분이 죽음앞에 괴로워하신다?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기도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굉장히 낯설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세계를 모르면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막14:51-52]에는 독특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한 청년이 알몸으로 홑이불을 두르고 붙잡히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리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두르던 홑이불을 훌러덩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런 내용이 [막14장]에 뜬금없이 두 구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청년이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그 부끄럽고 비겁한 모습을 그대로 적어놓았습니다. 얼마나 정직한 것입니까. 그런데 또 중요한 물음은 '그걸 왜 남겨놓았을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끄럽고 비겁한 나같은 사람도 주님이 부르셔서 제자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도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기도를 늘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정말 진실되고 정직한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위선적인 것들 가식적인 것들 많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마음속에는 그렇지 못한 모습들, 우리안에 있습니다. 힘들면 엉엉 울고 싶고 상처받으면 정말 괴로운 것, 그러나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 있습니다. 가리고 사는 많은 것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진실되고 정직하고 또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허풍, 허세와 같은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의 표현을 보면, "내가 주님 가는 곳에 어디든 가겠나이다! 죽는데도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의 만용을 보시고, "네가 닭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왜? 위선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허세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다 거두어지고, 우린 십자가 앞에 진지해져야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점점 십자가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끝에는 공중에 매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골고다 예수. 갈보리 예수. 처참한 죽음입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천하의 영웅도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 안에 이것이 없겠습니까.

히브리서 또 다른 말씀 [히4:15]에 그는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할 분이 아니시라고 말했습니다. 왜? 죄는 없으신데도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고통 눈물 다 받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고통에 위로가 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우셨겠습니까.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예수님은 곧 죽으시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오열하면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내용 중에 "아바 아버지여~" 이 말은, "아빠 아빠~! 살려주세요. 제발 죽지 않게 살려주세요. 살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어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런 말입니다. "아빠, 꼭 죽어야 해요? 다른 길 없어요?" 이런 기도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직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을 때 당당하게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당당하게 아무 감정도 없이 죽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예수는 성경의 예수가 아닙니다. [사53장]의 예언도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무 흠모할 아름다운 모습이 전혀 없었다고 예언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참으로 볼품없고 초라한, 지극히 인간적인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처절한 기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고

..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정직하면서도 진지한 기도, 허례허식이 없고 겸손하게 또 치열하게 드리는 그 기도를 다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래야합니다. 우리 삶도 이래야합니다. 허풍 허세로 사는 게 아니에요. 뭐 거룩한 척, 뭐 잘사는 척 하는게 아니고.

여러분, 우리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길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져야할 일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든 죄의 짐을 지고 가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다 그런 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달게 지고 갈 수 있을까요. 찬송가 가사 중에 "험한 십자가를 달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달게 진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잘 지고 간다는 얘깁니다. 그러자면 예수님의 이런 자세를 가지고 져야합니다. 솔직하게 힘든 것은 힘들어 하고, 울고 싶을 때는 하나님 앞에 펑펑 울기도 하고, 그러나 또 진지하게 은혜와 긍휼을 간구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7절 후반에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의 경건하심'이 바로 이런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갈 때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의식, 자화상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주님은 이 땅의 그 무엇에 근거를 두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근거를 두시고 하늘로부터 온 나, 하나님이 보내신 나, 이것 가지고 사셨습니다.

우리도 '거듭났다'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정체성을 우리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명하시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라는 것입니다. 불가분의 관계.

아들이란 말 속에는 아버지가 전제되어 있고 아버지란 말 속에도 아들이 전제되어 있기에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일치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들이면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순종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라고 말한 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신데도' '그가 십자가 그 길을 결코 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이런 뜻입니다.

[요18장] 이후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정치적 모함을 받아서 살해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그걸 헤쳐나갈 지혜가 없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안에 그들을 대적해서 이길 길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고난의 길을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두 가지를 던져야합니다. 우리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우리가 더욱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입니다. 첫째 어떻게 그 고난의 길을 죽음의 길을 순종하실 수 있으셨는가. 둘째 왜 그렇게 순종하셨는가. 그 순종의 이유가 무엇인가.

[창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이삭은 순종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네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번제는 죽여서 태우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고 아침 일찍 번제의 장소로 갑니다. 3일길을 이삭과 같이 갑니다. 가는 도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아빠?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딨어요?" 이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그리고 장소에 도착해서 이삭이 번제단에 올려지고 묶이는 것입니다.

이삭이 한참 자란 나이였는데 반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어떻게 순종했을까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그 엄청난 명령을 받고 어떻게 다음날 아침 일찌기 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건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내가 그렇게 되면 나보다 더 고통스러우실텐데.." 그것을 아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하실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구나" 믿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괴로움과 힘든 세계를 다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죽음까지도 순종하실 수 있으셨는가. 이 세계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이 기도의 깊은 세계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실때 아버지는 더 고통스러우실텐데.. 그 길을 가라 명하실 수밖에 없는 아버지는 더 힘드실텐데.."

어느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엄마가 병간호를 합니다. 비참한 병에 걸려서 까무라치는 수술을 수도 없이 하는데 엄마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아들이 견디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더 힘들텐데.. 엄마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느 신학자의 유명한 책 제목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들이 그 고통 받으실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도 괴롭고 힘들때 이런 질문 한 번씩은 던집니다. 항의하듯이,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반기독교 영화라고 하는 영화들 속에 이런 모티브가 많습니다. 최근 괴상한 귀신 영화를 어떤 이가 만들었는데 감독이 그 영화를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이렇게 치열한데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시는지 묻고 싶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고난 속에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어디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고통받으시고 더 괴로워하시면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 때에만에 십자가를 견딜 수 있고 달게 질 수가 있습니다.

둘째 질문, 예수님은 왜 그렇게까지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순종하셨을까요. 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Perfect. 완벽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완벽함, 이 온전성은 무엇입니까.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까지 순종하심으로 완벽한 일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요? 순종으로 그 관계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앞에도 말했지만 마음이 같으면 어떤 말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심으로,

..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렇게 순종하심으로 온전하게 되심으로, 모든 자에게 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 보고 우리도 그렇게 순종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멜기세덱은 성경 속에 갑자기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대제사장입니다. 인륜이나 이땅의 그 무엇으로 헤아려질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 이 땅의 그 무엇으로 말미암은 분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증거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심을 확증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죽음의 길까지 순종하심으로.

오늘 말씀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삶이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십자가를 이기신 비결을 좇아 살기를 바랍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순종'의 깊은 의미도 되새기면서 우리도 주님처럼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