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Ph. D. 연세대학교 교수 역임)의 논문 '삼일(3.1)정신과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을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3.1운동 이방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
④ 건국정신과 기독교정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한국교회는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해방 당시 한국에는 2,793개의 교회, 5,923명의 성직자, 459, 721명의 신도가 있었다. 비록 기독교인이 전인구의 2~3%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해방정국의 다양한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 중에 가장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건국에 대해 교계에서는 기독교가 민족의 영원한 정신적 양심과 건국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 합의되었다. 실제로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선교사들과 그들의 2세들이 정치 일선에 많이 참여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우파는 물론, 여운형, 김창준 같은 중간파와 대구 폭동의 최문식, 여순 반란사건의 이재복 같이 좌파도 기독교인들이 다수 관련 되었다. 교회가 해외에서 유학한 지식인들과 독립운동에 관여한 인물들을 가장 많이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의 주요 세 인사 김구, 김규식, 이승만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김구는 새 나라의 건국과 건교의 방책을 제시하며 경찰서 10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고 피력하였다. 김규식도 새 나라는 기독교선호의 국가를 세울 것을 희망하였다. 이승만은 만세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세우자고 하였다. 그는 이미 105인 사건을 최초로 『한국교회의 핍박』이란 제목으로 저술하며 하나님이 한국 백성으로 하여금 동양의 첫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시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그가 꿈꾼 나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설이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미국 선교사의 영향 아래 미국 민주주의에 의해 교육을 받아왔다. 기독교이념은 민주주의, 국민 주권주의, 삼균주의 정체를 갖고 있었다. 삼일정신의 요소나 자유민주주의적 개념인 자주독립, 정의, 인도, 평등, 평화의 정신을 두루 갖춘 기독교 사상은 사실상 건국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정체성에 따라 한국의 기독교회 인물들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신민회, 삼일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해 온 경험이 있었다. 새 나라의 건국에도 기독교의 영향을 미치고자 '기독신민회'를 비롯한 여러 정당 사회단체를 조직하여 직·간접의 영향을 미쳤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도 소신들을 피력하였다. 해방되자 교계에는 『해방의 종교』라는 설교집도 유포되었다.

기독교의 정신이 새 국가 건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이념에 적합하다는 점은 몇 가지로 인식되었다. 첫째 서구 여러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와 기독교가 성공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점, 둘째는 새 나라는 도덕성이 국가건강의 척도가 됨으로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건강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독교 밖에 없다는 점, 셋째는 기독교정신 자체가 민주이념을 잘 포용하고 있음으로 참 자유, 민주, 정의와 평등정신을 구현하는데 상통한다는 점이었다.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도 이점을 인식하고 민주주의를 일본에 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강화라고 인식하였다. 일본이 군국주의가 된 것은 그들의 국교인 신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기독교 확산정책을 종교정책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나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바랐다. 민주주의가 잘 자라고 정착되기를 바라서였다.

삼일운동 당시에도 교회가 전국화, 대중화, 기록화, 세계화하는 데에도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처럼 해방공간에서도 그 정신의 계승을 위해 적극 활동하였다. 우선 많은 교회들이 1946년부터 3.1절 기념행사를 3.1절 전 주일을 기하여 갖게 되어 거의 전통화 되었다. 별도로 3.1절 기념예배와 행사를 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북에서도 1946년 평양의 장대재 교회를 비롯해서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후 교회와 당국은 대립되고 교회의 핍박은 가중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에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은 한국교회의 인사로서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도 있었다. 그 중 첫째는 공산정권을 피해온 피난민들이 세운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였다. 그는 영락교회에서 건국에 관한 설교를 자주하였다. 대한민국 건국도상에 영락교회가 창립되었고 새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기독교정신과 가장 그 궤를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설교는 영락교회에서 한 설교였지만 이미 영락교회는 세계적 대교회로 급성장하여 그 영향력도 커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하여 새나라는 기독교 정신 위에 건설되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민주적이고 개인 인격 존중 사상을 갖고 있고 아울러 개인의 자유사상과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갖고 있기에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새 나라의 정신으로 알맞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통의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지내며 그 사명을 다했고 유교도 조선 왕조에서 정치규범, 종교, 도덕의 역할을 두루 감당하였으나 쇠잔한 상태여서 형식과 인습만 남아 있기 때문에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 기독교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는 이를 모아 『건국과 기독교』라는 설교집을 출간하였다.

두 번째는 해방 후 민주주의에 관한 저술로서 영향을 끼친 협성신학교와 이화여전 교수였던 한치진(韓稚振, Clarence C. Hahn, 1901-?)박사였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계학교인 중국의 금릉대학을 거쳐 미국의 남가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사회학, 철학, 심리학 등 다방면에 걸쳐 『종교개혁사요』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내었다.

최재건
▲최재건 박사
임시정부에서도 안창호, 손정도와 임시정부에도 관여하였다. 일제 말 수감되었던 그는 해방으로 출옥하여 『민주주의 원론』 전3권, 『미국 민주주의 이론』을 출판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때 민주주의 이론을 심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새 나라의 건국이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군정의 관직도 사양하였고 1947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지내다가 6.25 전쟁 직후에 납북되었다.

세번째는 당시 연희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였다. 그는 건국과정에서 한국교육의 이념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설정하였다. 그는 한국전통 사상인 홍익인간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기독교의 인류공영의 이상인 사랑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정신으로 새나라는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평화 애호정신을 아우르고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백낙준은 자신이 관여한 연세대학교에 대해 한국역사 4,000년과 기독교역사 2,000년이 만나는 곳이고 거룩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역사 속의 기독교를 주창하여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랑으로 한국인의 사랑 받는 민족정서에 맞는 교회의 역할론을 제기하였다.

건국기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활동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일제 때 많은 인재를 양성한 데 있었다. 국내에 교육기관을 많이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중국과 미국 같은 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주로 주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해외 유학의 여건들을 마련하였다.

기독교인이 건국 같은 정치 일선에 나선 것도 3.1운동 정신의 계승이었다. 해방이 되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독립되었다고 믿고 건국에도 앞장선 것이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로 끝맺는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도 기독교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