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이스라엘 해돋이 자연 유대인 호수
▲갈리리 호수의 일출. ⓒ픽사베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0)”.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함은,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곳이었고, 예수님 공생애의 대부분을 이곳 갈릴리에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다시 재회하심으로써, 부활의 빛 아래 그의 가르침을 확신시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고자 하셨습니다.

갈릴리의 위치는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이며, 남쪽으로 갈멜 산과 길보아 산, 북쪽으로는 레바논 국경, 동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 강,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해 있는 곳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갈릴래아’로, 개신교에서는 갈릴리로 각각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 속 갈릴리는 과거 이스라엘 12지파 중 아셀과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감동적이며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갈릴리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이자 주 활동 무대가 바로 이곳 갈릴리 지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이라 하여, 배우지 못한 하류층 사람으로 곧잘 폄하되곤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역할 당시 이스라엘은 갈릴리, 베뢰아, 유다 등 3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었고, 이 중 수도권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방이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엘리트로 권세를 누리던 지도자들에게 갈릴리 지방은 그저 변방에 속한 시골 촌구석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과 무언가를 같이 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출신 종교적 기득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변방 갈릴리 출신에다 인구 150-200명 남짓의 나사렛에 사는 시골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갈릴리는 문화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지역 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유다 지방보다 훨씬 도시적이고, 외부 문화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유다 지역보다 더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 성향이 짙었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의 믿음과 행동거지를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3일 후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그저 흘려듣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 한 자리 꿰차려는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절망적일 것 같았던 제자들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목적지인 가나안에 열 하루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문화와 종교에 젖었던 그들의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행복하게 살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려 40년 동안을 거친 광야 생활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우상과 문화를 제거하고, 고통의 시련을 끝내며 그들은 무사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입성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예수님을 줄곧 쫓아다니면서 믿음이라는 존재를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일 같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보고 듣고 행동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부인하고 도망하는 배신자의 처량한 신세로, 자기들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놓으시며, 사랑의 최고 완성작인 부활의 승리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갈릴리로 불러 모읍니다. 그 부활은 일찍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던 후 하루하루를 고통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으로 변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의 고통으로 우리 인간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고, 십자가로 말미암은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셨으며, 마지막에는 주님조차 하나님께 원망스런 말씀도 하시며, 우리 인간들의 원망을 품으시는 사랑으로 십자가 고난을 짊어지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활에 동참시키기 위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독생자의 희생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에도 사랑이라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주변을 둘러보면, 현실은 사랑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목격합니다. 게다가 작금의 우리 사회는 정치 이념이나 사상으로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며, 심지어 물어뜯기까지 모두가 피흘리며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구체적인 공동체의 제도 안에서 살아야 할 존재이기에,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은 정치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정치는 국민들로 하여금 심한 피로감으로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울 뿐입니다.

올바른 사회 공동체 형성과 지속을 위한 자구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대립과 분열의 상징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일진대, 여야를 막론하고 진정한 국민만을 바라보며 헌신하며 사랑과 땀으로 이뤄지는 사회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갈릴리가 볼품 없는 촌동네로 냉대받았지만, 장차 인류를 구원할 부활의 주님,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주시며 땅에서의 고통과 억눌림을 극복하고 장차 가야 할 본향 천국을 차지할 때 환한 영광과 위로가 온 갈릴리를 가득 메울 것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교만 때문에 갈릴리를 외면하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깊은 겸손과 낮은 자리를 위해 하늘나라 꽃을 피워가는 신앙인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원수조차 용서하라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올해 부활주일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화해와 용서로 온 갈릴리를 포용하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 전하는 일과 갈릴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고,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갈릴리의 충실한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갈릴리로 가라” 명령하신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기쁜 잔치 같은 부활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