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신성희의 ‘누아주’, 죽음을 이기고 나온 생명
예술 행위 한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묻는 여정
콜라주, 박음질, 자르고 붙이는 작업 등 선보여
천에 각종 색 입힌 다음 페인팅한 천 찢고 엮어
놀라움과 반전, 그의 작업 큰 원동력 되어 견인
전시: 갤러리 현대 두가헌, 7월 5-30일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코르테즈 바다에 관한 항해일지』에는 일몰시 조수(潮水) 웅덩이를 두리번거리다 한 노인 어부에게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존 스타인벡은 “우리는 참된 어떤 것을 찾고 있습니다. … 우리는 모든 생명의 패턴에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원리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탐색하고 있답니다”라고 말한다. 스타인벡에 있어 예술 행위를 한다는 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묻는 여정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도자(Seeker)’라고 부른다.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는 구도자를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영혼’으로 보았다.)
존 스타인벡과 같이, 신성희(1948-2009)도 진리를 추구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된 것은 무엇이고 어떤 삶의 형태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 탐색을 보였다.
한때 신대원 진학을 타진한 적도 있으나, 그 꿈을 포기하고 문화명령에 순종하며 화가로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작품은 단시일에 이뤄지지 않았다. 수십 년의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그러나 견실하게 형성돼 갔다. 작가는 1980년 부인 정이녹 여사와 함께 파리로 건너가, 전업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채색한 판지를 찢어 다시 붙이는 콜라주 작업, 채색한 캔버스를 규칙적으로 잘라 박음질로 이어붙이는 작업, 색점과 얼룩으로 물들인 캔버스를 자르고 다시 붙이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의 구도적 자세를 보여주는 작업은 채색된 판지를 찢어서 붙이는 콜라쥬 작업에서 두드러졌다. 색채로 뒤범벅이 된 질료가 아니라, 빛으로 치환된 매개물이란 점에 전문가들은 시선을 모았다.
오광수는 “현란한 색채의 향연은 계시적인 빛의 홍수”와 같은 인상을 준다면서 “빛으로의 환원은 물질로서의 색채를 정신적인 계시의 체험”(1985)으로 전이된다고 하였다.
평론가 이일은 “허황된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 삶에 대한 뜨거운 갈망의 세계”(1988)를 표상하고 있다고 했다. 두 평론가는 공통적으로 그의 회화가 기독교적 영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신앙세계를 드러낸 작업은 콜라주 작업 이후에 나온 ‘누아주(nouage)’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누아주’란 ‘엮다, 잇다’란 뜻을 지닌 ‘누에(nouer)’에서 비롯된 프랑스어로 신성희의 작품을 일컬을 때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마리 뷜또는 작가를 “붓과 가위의 특이한 리듬으로 장단을 맞추는 현대의 기사(騎士)”라고 불렀는데, 바로 누아주 작업을 겨냥하여 한 말이다. 정이녹 여사에 따르면 이 작업은 쓰다 남은 캔버스 조각들을 재생해 보려는 의도로 천 조각을 가로와 세로로 묶다 보니, 기존 회화와는 전혀 다른 두께감과 그림자를 동반한 작품이 탄생했다고 한다. 뜻밖의 발상이 오늘날의 ‘누아주’ 연작을 낳게 된 셈이다.
그의 ‘누아주’ 연작은 천에다 각종 색을 입힌 다음 페인팅한 천을 찢고 그것을 그물망처럼 화면에 엮어가는 과정을 거치는데 화면 전체를 이음으로 채우기도 하고 일부는 빈 공간으로 남겨두기도 하며, 방사형으로 시각적 진동을 퍼지게 하는 공간 구성을 취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찢어진 천을 ‘엮거나 잇는’다는 대목이다.
“나의 작업들은 찢어지기 위해 그려진다. 그리고 찢는다는 것은 이 시대의 예술에 대한 질문이며 그것이 접히고 묶여지는 것은 곧 나의 답변이다. … 묶여진다는 것은 결합이다. 너와 나, 물질과 정신, 긍정과 부정, 변증의 대립을 통합하는 시각적 언어이다.”(2001)
누아주 작업의 성격이 드러난 작품은 <생명공간>이다. 동그란 프레임에 천을 이어붙인 것으로, 매단 색색의 천은 단순히 장식용이거나 놀이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던 형관(荊冠)의 이미지, 즉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그 분이 받으셨던 고난을, 여기서 누아주가 지닌 함의는 우리의 운명을 바꾼 아름다운 죽음과 연결된다.
이어서 나온 <공간별곡>은 누아주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찢음’과 ‘이음’에 의해 완성됐다. 여기서 ‘찢음’은 단순한 천을 찢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희생과 헌신에 맥이 닿아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다(사 53:5).”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수난을 겪고 세상 짐을 지고 가신 분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의 적정률(decorum)은 신성희에게 있어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찢음’은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상의 방법은 채우고 쌓고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찢음’은 버리고 낮추며 순종하는 의미에 가깝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본 모습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의 속성도 드러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형벌을 받아들인 까닭에 우리를 옭아매던 죽음의 덫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단계는 ‘이음’으로 연결되는데, 만일 ‘찢음’만 있고 ‘이음’이 없었다면 죽음만 있고 부활은 없는 상태와 같았으리라. 부활은 하나님이 능력과 사랑으로 역사하셔서 죄와 사망을 멸하시고 자신의 창조세계를 회복할 것을 예고한다.
이는 인간이 망가뜨린 상한 세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창조세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소망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평면회화는 일종의 일루전(幻影)의 세계, 그러니까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을 이식시키는 부단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3차원은 여전히 2차원에 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아주 작품에서는 실물처럼 그림자를 갖고 공간속에 건재하다. 작가가 “우리도 저 사물들과 생명체처럼 그림자를 만들자”고 말한 것은, 일루전에서 실체로의 귀환이요 회복을 의미한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캔버스에 생명을 주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그 일은 그림자를 동반한 실재물이 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던 존재가 그리스도의 ‘찢음’과 ‘이음’을 통해 새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홍정길 목사는 이를 “찢겨진 것을 공간으로 묶어서 부활의 놀라운, 평면으로는 이룰 수 없는 부활의 신비를 드러냈다”고 그 의미를 짚어냈다.
그의 작품은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지만, 화면을 그물망처럼 엮어가면서 만들어내는 조밀한 짜임관계와 여러 천들이 합쳐지면서 생성되는 색채의 즐거움을 덤으로 선사하기도 한다. 작업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손에 피멍이 들 정도로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가능했을지 자문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세상의 고통이 해결되는 궁극적 소망을 기독교 서사에서 찾았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여기는데, 신성희 작가만은 예외였다. 죽음을 이기고 나온 생명이 그 안에 번뜩인다.
예기치 못한 사실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 반전, 이것이 그의 작업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작품세계를 견인하고 있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